'광화문 인사이드'는 청와대,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총리실 등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이 쓰는 '정보'가 있는 칼럼입니다.[편집자말] |
북한이 연일 '도를 넘은 대남비난'을 쏟아내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북한이 우리 정부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과 조롱을 하고 있다는 것. 판문점, 평양, 백두산 등에서 두 손을 맞잡았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관계가 틀어져 북한이 '통미봉남(미국과 통하면서 남측을 배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우려가 쏟아지는 배경에는 지난 11일 북한의 외무성 권정근 미국 담당국장이 낸 담화가 있다. 권 국장은 청와대를 향해 "쫄딱 나서서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린다"라거나 "겁먹은 개가 요란스럽게 짖는다"라고 했다. 11일부터 열흘간 이어지는 '후반기 한미연합지휘소훈련'의 첫날이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안보 무능론'을 꺼내며 정부와 여당을 향한 공세 수위를 높였다. 11일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주장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정책이 총체적 실패였음을 뼈아프게 반성하고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를 공식 선언한 뒤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라"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14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최근 연이은 북한의 무력도발과 문재인 대통령을 따돌리며 모멸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폄훼하는 행위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북한이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남한을 비난하고 있는 '진의'와 관련해 지난 12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결국 훈련 끝나면 실무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청와대가) 그 외 단어 하나하나, 어감 등까지 거론하면서 대응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 맞는 것인지 정무적 판단이 필요했기에 (청와대가) 거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북이 남에 우호적일 때, '남조선당국'
보수 야당의 비판대로 북한은 문 대통령에게 맹공을 퍼붓고 원색적인 조롱을 하는 걸까? 북한의 대남비난을 어떻게 봐야 할까?
힌트는 '남조선 당국'에 있다. 권정근 국장의 담화는 '청와대'나 '남조선당국'이라고 지칭하며 비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남조선당국'은 남북 관계가 좋을 때 북한이 남한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박종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북한 신년사 텍스트분석, 1946 - 2015>라는 논문에서 북한의 신년사 69년 치를 자동화된 텍스트 분석 기법을 사용해 통계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을 부르는 호칭이 33가지에 달했다. 북한 신년사에 사용된 대남 호칭은 대부분 괴뢰통치배, 군사깡패, 군사파쇼독재, 남조선호전광, 괴뢰도당, 주구, 반동파 등 부정적 의미가 강했다.
북한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파쇼도당, 괴뢰도당 같은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다소 우호적인 호칭이 등장한건 4·19혁명 후 민주당 정권이 등장한 1961년이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인 90년대 초반, 1차 북한 핵 위기 해소 이후 김영삼 정부 초기 때다.
그때 사용된 표현이 '남조선당국', '남조선당국자', '당국'이다. 통계는 이를 북한이 남한을 칭한 용어 중 가장 강한 긍정적인 호칭(strong positive)이라고 분류했다. 보수 야당이 대남비난이 높아졌다고 지적하는 지금, 북한이 남한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 8일 북한의 대남 공식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이 통일선전국 명의로 대남비난을 했을 때도 '남조선 당국'이라는 호칭이 사용됐다. 조평통은 "남조선 당국은 우리(북한)로 하여금 국가 안전의 잠재적, 직접적 위협들을 제거하려는 대응조치들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고단할 정도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기영 전략연 책임연구위원은 1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사실 남북관계가 괜찮을 때 북한이 남한을 '남조선당국'이라고 했다. 지금 대남비난의 용어나 수위가 높은 거라고만은 볼 수 없다"라고 풀이했다.
북의 대남비난, 문재인 대통령 언급 없어
북한의 대남비난에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이 들어간 적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권 국장의 담화 역시 문재인 대통령을 콕 짚어 비난하지 않았다.
사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도 6·15 정상회담 이전까지는 대통령을 향해 '파쇼광신자', '괴뢰통치배', '남조선 집권배' 등의 비방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그러다 2000년 6·15선언 이후부터 노무현 대통령 집권 기간에는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고 '남조선 집권자' 등으로 순화해 표현했다.
대통령을 향한 직접 비난이 재개된 건 이명박 대통령 때다. 북한의 관영매체 <로동신문>은 2008년 4월 1일 '남조선 당국이 반북 대결로 얻을 것은 파멸뿐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제목에는 '남조선당국'이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내용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을 '역도'로 규정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2개월여 만에 북한은 관영매체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해 비난했다.
앞서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의 기본 틀로 제시한 '비핵 개방 3000'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바 있다. 비핵 개방 3000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하면 10년 안에 북한 주민 1인당 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준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이 대통령의 임기 내내 이 대통령을 '천하역적' '매국역도' '파쑈깡패무리'라고 표현했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X'까지 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28일 <로동신문>은 한 면 전체에 박근혜 정부를 비난하며 박 대통령을 향해 '암개(암캐) 같은 X', '괴벽한 노처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앞서 북한의 선전·선동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박 대통령의 당선 전인 2006년 6월 14일에 그를 향해 "아비를 개처럼 쏘아 죽인 미국에 치마폭을 들어 보이는 더러운 창녀"라고 폄하한 바 있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때와 비교하면 지금 북한은 대통령을 향해 직접 비난을 하지 않고 있다. 북한도 조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북한의 대남비난은 남북 관계의 전체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남북 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된 2018년과 비교하면 북한의 비난 수위나 빈도가 높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지난해와 올해를 비교해 남북 관계를 단정하거나 문재인 정부의 안보 문제를 지적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지난 70여 년 남북 관계에서 북한이 남한을 어떤 용어를 사용하며 불러왔는지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북한 신년사 텍스트분석, 1946 - 2015> :박종희, 박은정, 조동준, 한국정치학회 201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