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이 이야기는 두 남자의 정신병원 탈출기다.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조종당하다 세상에서 도망쳐버린 책방 아들 이수명. 재벌 회장의 혼외자식으로 다른 아들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퇴출당한 류승민. 승민은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탈출을 시도하고, 조용히 찌그러져서 살고 싶었던 수명은 승민이 벌이는 사건에 계속 엮이면서 의도하지 않은 스펙타클한 병원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7년의 밤>, <28>, <종의 기원>으로 '한국의 스티븐킹'이라는 수식어를 얻고, 최근 <진이, 지니>를 출간한 정유정 작가의 초기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 중에 보기 드물게, 독자가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특히 유머러스하고 거침없고 뻔뻔하기까지 한 승민은 매력적이다. 그는 탈출과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좌절이라고는 모르며 말과 행동에 필터가 전혀 없다.
전날 밤 본 승민의 눈이 신경을 자꾸 건드렸다. 어둠 속에서 마주쳤던 눈빛이 생생 하게 기억났다.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편한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의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려 들면 들수록 혼란만 커졌다. 머릿속 한구 석에서는 현자의 목소리가 타이르고 있었다. '그놈한테 신경 꺼' (p. 141)
수명은 묘하게 거슬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계속 신경이 쓰이고, 걱정도 되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병원 탈출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장소가 정신병원으로 한정돼있음에도 '로드무비'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승민과 수명이 함께 모험을 하고 위기를 겪고, 끈끈해지고 성장하면서 브로맨스를 키워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심한 듯 세심하게 튀어나오는 블랙유머는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게 만든다.
승민은 신음을 흘렸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다. 충격을 받은 기색 이 역력했다. 내게는 그런 승민이 더 충격적이었다.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인 자가 없다고 한탄하는 게 과연 정상인가 말이다. 두 번씩 병원에 갇혔으면서 배운 것이 그리도 없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늘만 쳐다봐도 피가 끓는 '싸나이 류승민'의 속을 긁어주고도 싶었다. 탈출은 물 건너 간 듯하니 노후대책으로 정신병자 팔자에 대해 '가'부터 '하'까지 제대로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p. 298)
우리는 대부분 세상에 순응해야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정신병원은 그런 우리 삶의 은유다. 현실을 벗어나려 발버둥 쳐보지만 실패하고 좌절하고 결국 제자리인 삶. 벗어나고 싶지만 현재를 부정하게 될까봐 두려움에 시도조차 못하는 삶.
수명 역시 대면해야 할 진실이 무서워서 세상에서 도망치고 자신에게서 도망친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고 진실을 마주보게 되는데,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바로, 승민이다. 그리고 김용, 십운산 선생, 우울한 세탁부이자 책장수라 불리는 정신병원의 환자들이다.
성장과 치유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결말이 예정된 삶일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함께 세상 밖으로 질주해야 한다고.
"넌 누구냐."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 하는 놈. 있기는 하냐?" (p. 258)
승민의 질문에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는 수명처럼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독자의 머릿속에도 이 질문은 강렬하게 새겨진다. 그 답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방황하고 있는 청춘들,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숨쉬기 버거운 사람들의 심장을 잠시나마 다시 뛰게 해줄 것이다.
승민과 수명이 세상을 향해 얼마나 통쾌하게 한 방 먹이고 탈출하는지, 혹은 실패한 그들을 기다리는 또 다른 현실이 무엇일지. 심사평의 표현대로 '가슴 서늘한 뜨거운 감동'을 주는 수명의 무서운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일단, 책장을 넘기고 수리 희망 병원 사람들을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