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새벽(한국시각) 제74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비무장지대의 국제평화지대화 구상'을 설명하면서 판문점과 개성을 잇는 지역을 '국제평화협력지구'로 지정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북한체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제안으로 풀이된다. 청와대는 '비무장지대의 국제평화지대화 제안'을 '문재인 외교·안보독트린의 2단계 행동계획'으로 본다. 1단계 행동계획은 지난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합의한 '9.19 남북군사합의서'다.
그러면서 "비무장지대 안에 남북에 주재 중인 유엔기구와 평화·생태·문화와 관련한 기구 등이 자리잡아 평화연구·평화유지(PKO)·군비통제·신뢰구축 활동의 중심지가 된다면 명실공히 국제적인 평화지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구상은 31년 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제안한 '비무장지대 평화시 건설' 구상을 연상시킨다.
"휴전선 안 비무장지대 안에 평화시 건설하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직후인 1988년 10월 18일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이라는 제목의 유엔 총회 연설에 나섰다.
그는 "휴전 후 지난 35년 간 엄청난 군사력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맞서 왔다"라며 "이 대결의 구도를 종식시키는 것은 서로를 가르는 벽을 허물어 서로 개방하고 교류·협력해 믿음을 심는 길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35년(1953~1988)간 지속된 한반도의 대결구도를 종식시킬 방안으로 '비무장지대 평화시 건설'을 제안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나는 북한이 당장 문을 열고 개방을 실시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면 휴전선 안 비무장지대 안에 '평화시'를 건설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 '평화시' 안에서 30년 이상 헤어졌던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자유로이 만나며, 민족문화관, 학술교류센터, 상품교역장 등을 설치하여 폭넓은 교환, 교류, 교역을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비무장지대의 국제평화지대화'가 국제사회의 협력을 전제로 한 제안이라면, 노 전 대통령의 '비무장지대 평화도시 건설'은 민족공동체 차원에서 남북이 적극적으로 교환·교류·교역을 하자는 제안이다.
그는 "우리는 나아가 민족 전체의 번영을 위해 남북한 간에 끊어진 도로와 길을 연결하고, 서로가 가진 인력·기술·자본을 동원해 공장을 함께 짓고 국토를 함께 개발하는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라고도 했다.
이는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론'과도 연결되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론은 '평화-경제협력의 선순환 구조'에 바탕한 것으로 '평화가 경제협력으로 이어지고, 경제협력이 다시 평화를 굳건하게 한다'는 구상이다.
'무력사용 금지, 군비축소, 평화협정 체결'도 제안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유엔 총회 연설에서 '비무장지대 평화시 건설'과 함께 무력사용 금지, 군비축소, 휴전협정의 항구적 평화체제로의 대체 등도 제안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남북 간의 불가침선언이 있기 전에라도 북에 대하여 먼저 무력을 사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남북한은 오늘날과 같은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안정된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4일 오전(한국시각)에 열린 아홉 번째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노 전 대통령은 "나는 (김일성 주석과의) 이 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와 통일실현 방안, 남북간의 교류협력, 군비축소 등 군사문제를 포함한 쌍방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타결할 것을 제의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휴전협정을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대체하는 구체적 방안도 이 회담에서 강구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일관되게 추구해온 '종선선언-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내용이다.
이보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지난 1988년 8월 15일 김일성 주석이 용의가 있다고 화답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다만 노태우 정부의 대북화해정책은 3년 뒤인 1991년 '화해와 상호 불가침'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국가기록원은 "한국의 북방정책 추진이 한반도 평화→동북아 평화질서→태평양시대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천명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추진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국가기록원은 "한국의 평화구축 및 전방위 외교정책에 대한 유엔 회원국의 폭넓은 지지와 성원을 확보함으로써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대북화해정책은 대내외적인 지지와 함께 정책추진은 보다 적극화되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공통적인 표현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든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인용한 문장도 거의 같아 눈길을 끈다.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든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문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으로 '칼이 쟁기로 바뀌는' 기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고, 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칼을 녹여 쟁기로 만드는 날, 세계에는 확실한 평화가 올 것이다"라고 썼다.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든다'는 말은 '주검위리'(鑄劍爲犁)라는 중국 고사성어에서 왔다. 주검위리는 전쟁을 끝내는 행사로서 '칼'(무기)를 부수고 녹여 '쟁기'를 만들면서 평화를 다짐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이사야 2장 4절에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고 적혀 있다.
개인과 정권의 정치적 성격은 달랐지만 31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적대관계와 정전상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서만큼은 두 지도자가 같은 길 위에 서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