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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마을을 둘러싼 산등성이 골짜기마다 무덤들이 줄지어 있는 곳. 은진 송씨 가문의 집장지인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는 오백년이라는 긴 세월이 간직해 온 천여기의 묘역이 있습니다. 1499년 목사공 송요년의 묘역이 들어 선 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묻히면서 거대한 문중묘역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마을 안에는 선비의 고장 대전을 있게 한 은진 송씨 가문의 많은 유학자와 선비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대전을 대표하는 동춘당 송준길의 선친과 조부모의 묘역도 자리하고 있지요. 살아서는 회덕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그들이 마지막 안식처로 동구 이사동과 판암동, 마산동을 택했는데, 그 중 가장 번성했던 목사공 송요년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였고, 덕분에 이사동은 산 사람의 집보다 누워 잠든 사람들의 무덤이 더 많은 마을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을길 따라 기와지붕을 인 재실들이 늘어서 있고, 그 너머 산등성이로는 둥그런 봉분들이 즐비한 독특한 곳이지요.

봉분에 깃든 사연

천여기가 넘는 봉분들에 깃든 수많은 사연들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득한 세월 속에서도 잊히지 않고 남겨진 흔적과 기록들이 있어 그들의 삶을 짐작해 볼 뿐이지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답사객의 발길이 자주 오가는 곳도 있고, 일렬로 쭉 늘어선 묘역이 장관을 이룬대서 연일 카메라 세례를 받는 묘역도 있습니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들 사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의 기구한 삶도 있겠지요. 오늘은 그 중 하나인 송희갑의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문중 후손인 송준길과 송시열도 칭송했던 문장가 송희갑은 송담 송남수, 금암 송몽인과 더불어 이사동 3대 시인이라 불리고 있으나, 명망 있는 활동을 하며 문집을 남기기도 했던 두 사람에 비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1584년 송수의 여섯 명의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서자라는 출신의 한계 속에 살아가다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죽음도 이견이 분분하며 시기도 정확치 않으나 스승이었던 석주 권필의 연보 1606년에 '전염병에 걸려 근 사십 여일을 헤매다가 제자 송희갑의 헌신적인 간병으로 겨우 회복되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1606년 이후임은 분명하지요. 또한 사촌 송몽인의 금암집에 기술된 희갑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십 년 동안 도를 배운 몸은 천리 밖으로 사라졌네. 반 세상 재주의 명망은 한마탕 꿈이 되고 말았네'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봐서 권필에게 수학한 기간이 십년 가까이 된다고 추정하자면 졸한 시기가 1610년쯤이 된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동의 3대 시인이라고는 하나 그가 남긴 시는 단 두 편 뿐입니다. 그가 직접 기록한 글이나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문중어르신인 당숙 송남수의 송담집에 실린 기록과, 문중 후손 송시열의 송자대전, 스승 권필의 시 작품, 스승의 벗 조찬한의 글, 남용익의 시선집 '기아' 등에서 그와 그의 작품들이 거론되었을 뿐이지요. 두 편의 시로 전해지는 한 많은 삶이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과 기록 속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을 마다않고 병든 스승을 돌보는 참된 제자였으며, 몸을 사리지 않고 온갖 일을 도맡아 한 의인이었고, 형들의 죽음에 지극히 슬퍼하는 우애 깊은 아우였습니다. 요절하기엔 너무나 많은 재주를 가진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두 편의 시에는 어떤 정서가 담겨 있을까요? 희갑의 재주 많음을 전해들은 문중 어르신 송남수가 그를 시험하기 위해 시를 써보라고 권유합니다. 하얗게 눈 내려 쌓인 집 뒷담의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말이지요. 이제 막 이를 갈기 시작한 예닐곱의 어린 아이는 주저 않고 그 자리에서 풍경을 읊었는데, 그 시가 여러 사람의 기록에 의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나무 집안 오늘 아침 부모를 여의었나 
수많은 자손들 가지런히 흰 옷을 입었네    
늦게 찾아온 참새들 서로 조문 하더니 
볕들고 바람 부니 맑은 눈물 난간에 떨어지네

竹也今朝喪父翁 子孫千百素衣同 晚來鳥鵲來相弔 清淚欄干日下風

즉석에서 유창하게 지어내는 솜씨에 감탄한 송남수는 당대 명 문장가 권필에게 이를 알리고, 그의 제자가 되도록 소개하고 후원합니다. 강화도에서 칩거하던 권필을 찾아가 수제자가 된 송희갑은 여러모로 출중한 모습을 보입니다. 초당을 짓는 것에 열성을 다해 일꾼들을 놀라게 했고, 궂은 일 마다않고 솔선수범 했으며, 공부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영민하고 열심이었습니다. 몇 십 명이 되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열성적인 제자였지요. 그의 진면목은 스승의 병간호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돌림병이 걸린 스승을 지극하게 간호한 일이었지요. 제자의 진심어린 정성에 감동한 권필은 병에 차도를 보이던 어느 비오는 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24수의 연작시를 풀어냅니다. 그 중 한 편이 바로 제자 송희갑을 위한 시입니다.
 
부끄럽다 부족한 몸 헛된 이름 얻어서
천리 길 멀다 않고 송생이 찾아왔네.
물 긷고 나무하며 부지런히 일을 하니
묻노라 힘들여서 무얼 이루자는 건가.

多慙蹇劣得虚名 千里相従有宋生 汲水採薪勤服役 問渠辛苦欲何成 

송희갑의 행동이 다른 생도들과 달랐고 권필의 제자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권필의 친구 조찬한은 아예 송생전이라는 제목으로 벗의 제자인 송희갑을 기록했으니까요. 
 
"일찍이 서재를 짓는데 몸소 일을 맡아 하면서도 게으름 부리지 않았다. 단단한 것을 쪼개고 무거운 것을 날라 항상 몇 사람의 몫을 해냈다. 목공이 미처 다듬지 못한 것은 나서서 이를 베어와 가르고 새기는 공교로움이 평소 전공으로 한 자와 다를 바 없었다. 수리하고 흙을 발라 며칠이 못 되어 일을 마치니, 목공이 혀를 내두르며 '힘과 재주가 모두 뛰어나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여러 학생들과 생활함에는 해가 뜨기 전에 글을 읽고, 아침이면 물을 길어와 불을 지펴 몸소 밥 지어 이들과 함께 먹었다. 밥을 먹고는 지게 지고 낫을 들고 산에 가 나무하여 섶을 지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또 책을 읽는데, 관솔불을 살라 해를 이어 이것으로 밤까지 읽었다. 생도 가운데 게으르고 태만하던 자들이 격동되어 삼가 부지런히 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중략)

하루는 마치 즐겁지 않은 일이 있는 듯 하더니 그날 저녁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스스로 빈 네모 안에 '형(形)'자를 쓴 것이 거의 수백 개나 되었다. 깨고 보니 꿈이었다. 문득 이와 같은 꿈이 여러 날 계속 되자 이것으로 스스로 죽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을 가지고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뒤 병이 조금 낫자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서는 병이 위중해졌다. 그 스승 석주에게 편지를 보내니, 대개 그 말이 자기의 병들어 아픈 것은 마음에 두지 않고 오히려 그 스승의 곤궁하여 괴로운 것만 염려하였다. 마침내는 그 병으로 죽었다. 도를 믿고 섬김을 독실히 함을 한결같이 한 자가 아니라면 이를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아아! 선비가 뜻을 깨끗이 하고도 이름이 묻히어 없어진 사람을 고금에 어찌 헤일 수 있으리오? 그러나 그 세운 바의 도탑고도 확고함이 또한 송생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 더 오래 살게 하여 그 사업을 충실하게 하였더라면 성현에 도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로되, 하늘은 송생을 이미 태어나게 하고 또 요절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뜻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아! 슬프도다."
- 조찬한, 송생전 (정민 譯)

조찬한은 송생전을 통해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살았던 송희갑의 삶을 칭송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생전의 내용과 문중에서 전해지는 기록이 다릅니다. 문중 후손인 송시열이 쓴 송자대전에서는 중국으로 가 신분의 한계를 떨쳐 버리고 마음껏 재량을 발휘하라는 스승의 뜻을 좇아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열심히 수영을 하다가 기혈이 삭아져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찬한의 입장에서는 죽음 앞에서 누구에게 책임 전가를 하기 어려웠을 테지요.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긴 하지만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는 그를 아끼고 칭송하는 마음은 어느 글에서건 같습니다.

단 두 편만이 남아있는 시 중 나머지 하나는 병을 얻고 집에 돌아와 읊었다는 시입니다. 
 
산에는 꽃 피고 언덕엔 수양버들
이별의 정 안타까워 홀로 한숨 내 쉰다
지팡이 굳이 짚고 집 나와봐도
그대는 오지 않고 봄 날 저문다 
岸有垂楊山有花 離懷無處不堪嗟 強扶衰病出門望 之子莫來春日斜
- 송희갑 春日待人 (정민 譯) -   
 
그가 간절하게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스승 권필일 수도, 누군가 연모하던 여인일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학문에 매진하던 그에게 이룰 수 없는 현실의 꿈이 그리움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남긴 두 편의 시의 정서가 슬픔과 회한이라는 것이지요. 조선시대 서자로 태어난 천재 시인에게 타고난 운명 같은 서글픔이 있었나봅니다. 재주는 출중했으나 신분상의 한계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니 당연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에서의 그는 건강하고 활기찬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희갑이 산에 놀기를 좋아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도보로 가서 샅샅이 다 훑어보았다. 일찍이 속리산에 놀았는데 조그만 암자가 절벽에 임하여 있었다. 희갑이 몸을 날리어 기와에 의지하여 한 손으로 연목을 붙잡고 한 손으로 붓을 쥐고 성명을 적어 놓고 내려왔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이 마치 나는 신선 같았다. 지금도 노승들이 말하고 있다' 
- 송시열, 송자대전

서글픔의 정서를 가졌지만 현실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청년. 그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었나 봅니다. 작품집 하나 없고 전해지는 시도 단 두 편에 불과하지만 문중에서 쟁쟁한 인물들과 함께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송희갑은 서자의 신분임에도 조부와 부친이 모셔져있는 이사동 묘역에 그의 묘비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 사연은 이러합니다.

송희갑의 묘는 원래 용전동 터미널 부근에 자리했는데 후손이 없어 방치되다가 결국 인근 주택지 개발공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만 묘비만이 남아 동네 아낙들의 빨래판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우여곡절을 거쳐 후손인 송서호씨에 의해 조부와 부친이 있는 이사동 묘역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빨래판으로 닳아 없어질 뻔한 비석 안에는 요절한 천재 시인의 생이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그의 애달픈 삶을 이야기 해 주는 소중한 단서들이죠. 
                   
'공의 이름은 회갑이고 자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은진 사람이다. 조부는 가선대부 첨사 세욱이고 부친은 인의 수다. 동춘 선생이 그의 높은 재주와 색다른 거동을 특히 칭찬하였고 그의 처지가 한미하고 또 요사하여 묻혀서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누차 말씀에도 나타내었고 슬퍼하여 탄식하고 그 묘소에 표를 하려고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가 어른 참관공 규렴이 여러 일가들로 더불어 두 선생의 유지를 달성하려 생각하였다. 이미 조그만 비석을 다듬어 나, 주석에게 말씀하기를 '이 일은 동춘 선생과 그대의 조부 우암 선생께서 일찍이 권권히 여기시던 바니 어찌 한 마디 말을 써서 선세의 뜻을 베풀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

1691년 세워진 이 비문은 송시열 손자인 주석이 글을 짓고 송준길의 손자인 병익이 글씨를 썼습니다. 문중 후손인 송시열과 송준길이 내내 계획하던 일이었는데 그 다음 세대로 까지 이어지며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 덕분에 비석이 만들어지고, 다시 이렇게 선조들의 묘역에 자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동에 자리한 천여기의 묘역들에는 다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지요. 그 숱한 삶의 우여곡절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남겨진 이야기들이 있어 우리의 발길이 닿고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오백년이라는 세월 위에 징검다리처럼 놓여진 그 많은 봉분들 속에는 비석으로 남아있는 송희갑도 있습니다. 가슴 가득 빼곡하게 애달픈 삶을 새겨 넣고서 말이지요. 그가 있기에 이사동을 더욱 애틋하게 만나게 됩니다.

한소민 

10여 년 간을 방송작가로 살다가 지금은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충남대학교 지역문화콘텐츠 연구소 연구원이자 한밭문화마당의 활동가로 대전의 역사와 문화의 스토리텔링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사동과 대청호, 이응노미술관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기까지 정민 선생님이 내 놓으신 책과 후손이신 목사공 종중의 송서호 회장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대전그곳을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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