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고태은은 '쌍용자동차 해고 10년 백서' 작업의 실무를 맡아 쌍용자동차지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편집자말] |
크리스마스이브,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지부) 노동조합 사무실로 '노사합의서'가 날아들었다. 여기서 '노'는 기업노조(쌍용차 노조)다. 기업노조와 회사가 해고자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합의한 것은, 노동자들의 현장 배치를 무기한 연기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관련 기사:
갑자기 무기한 휴직, 쌍용차 복직 예정 노동자들 '날벼락')
쌍용자동차는 2009년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정리해고란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해고다. 그 '어쩔 수 없음'이 진짜인가를 따져보기 위하여 해고무효 소송도 진행되었다. 해고무효소송에서 재판부는 해고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듯했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됐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재판은 양승태 대법원 '재판 거래' 의혹의 사례 중 하나였다.
해고자들은 2015년까지 해고의 부당함을 밝혀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르는 법도 배우고, 회계도 배웠다. 고등법원에서 해고가 무효라고 판결한 것은 쌍용자동차의 회계 조작을 밝혀낸 결과였다. 그뿐인가. 거리에서, 철탑에서, 굴뚝에서, 분향소에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곡기를 끊기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얻어낸 것이 2015년의 복직합의였다.
해고자들이 견딘 10년... 그들은 시간을 바로잡고 싶었다
'해고 당한 지 10년이면 그동안 어디 나가서 가족들 먹여 살릴 생각을 해야지, 왜 아직도 복직을 외치고 있냐'는 말들이 여전히 나온다. 해고자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말은 해고자들의 지인들로부터도, 서로에게서도, 아니 사실은 스스로도 많이 외쳤던 말이다. 2009년 파업 당시 많은 이들은 회사와 회사 안 동료들에게 정이 떨어져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며 희망퇴직을 쓰고 떠났다. 희망퇴직을 쓰지 않았더라도 파업 이후에 연락을 끊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해고 2년 후부터, 지부는 남은 사람들이 복직 투쟁을 할 테니 미안해말고 가족들 책임지러 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으므로 가족을 책임져야 해서 혹은 투쟁에 상처받아서 조합원들은 각지로 떠났다.
2009년 해고 이후 해고자들은 그냥 살아지지 않았다. 파업이 끝난 후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직금은 가압류 금액으로 잡혔다. 많은 이들이 구속되었고, 구속되지 않은 사람들도 백여 명이 1년 가까이 무작위 소환조사로 인해 제대로 직장을 다닐 수도 없었다.
지난 국가폭력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에도 나왔듯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때 이명박 대통령의 승인 하에 조현오 당시 경기도 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른 과잉진압이 있었다. 크레인에 달린 컨테이너 박스에서는 특공부대가 가득 실려 내려왔고, 조합원들은 그 크레인에 실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았다. 파업 후 구속수사 중에 치료를 요구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노는 쌓였고, 마음에도 멍이 들었다. 어떤 동료는 파업 당시의 환각에 아직도 휩싸여 산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하루, 일주일이 무섭게 사람이 죽었다. 당사자도, 아내도, 뱃속의 아이도 죽었다.
그래도 살아보려 했다. 많은 이들이 건설 노동도 하고 평택항 항만에서 일용직 노동도 했다. 택시도 몰았고, 화물차도 몰았고, 공사장 크레인도 몰았다. 자동차 부품사에 들어가 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쉽지 않았다. 회사가 약속했던 일자리 면접에서는 '도장 공정하다 페인트 통에 질식해 죽을 수도 있는데 일하겠냐'는 협박이 대놓고 나왔다.
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평택을 떠났거나 쌍용자동차에서 일했다는 것을 숨겼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살아보려 했다. 2008년부터 제대로 나오지 않던 임금으로 이미 파산 직전이었는데, 그래도 회사를 살려보겠다며 사둔 차 빚도 갚고, 투옥되고 조사받는 동안 생긴 빚도 갚으려 했다. 원래 받던 임금보다 못한 수준이어도 애써서 버텼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동료들의 죽음 소식이 들렸다. 이렇게 나만 살아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인한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각자가 기억하는 동료들의 죽음은 다르다. 그렇지만 2009년 정리해고 이전에 공장 안에서 함께 밥을 먹고 일했던 동료들이 나처럼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다 들려온 소식이 죽음이라는 것이 이 투쟁을 포기 못하게 했던 것이다.
어떤 이는 하청 공장에서 일하다 과로사로 사망했고, 어떤 이는 먼저 간 아내 몫까지 아이를 키우며 일하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떠나게 됐고, 어떤 이는 연탄불을 피워 자살했다. 이렇게 많은 당신들이, 왜 허무하게 가야 했나 생각해보면 '정리해고'라는 삶에 잘못 끼워진 단추가 다시 끼워져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복직해서 공장 안에 들어가 하루라도 일하고 관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지나간 시간을 책임져주지 않지만, 복직으로 공장에 돌아가 일하는 것으로 거리에 나앉았던 시간을 바로잡고 싶었다.
다시 손에 손을 잡는다
이미 복직 합의는 2015년에 했다. 이를 미루고 미루다 2016년 이후에도 사람이 죽었다. 고작 언제까지 복직을 시키겠다는 기한을 알려주지 않아 기다리며 지옥 같은 시간을 살던 이가 또 죽었다. 이것이 안타까워 시민들과 정부가 나서 노노사정 합의를 만들어 냈다. 2018년에 한 복직 기한을 명시한 합의는 '언제까지는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하는 기한을 정해준 것이다. 해고자들은 드디어 고통의 시간이 조금 가실 거라고 생각했다.
복직은 다시 공장에 작업복을 입고 돌아가 볼트를 조이고, 라인을 타는 것 자체다. 상처받은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있지만 그래도 떳떳하게, 공장에서 노동하고 가족들에게 부족했던 지난 세월을 채워주는 것의 시작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 가족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조촐한 파티를 위해 케이크를 사던 중 문자로 노사합의안을 받았다.
2015년부터 아주 잔인하게 짓눌리듯 이어지는 삶이 또 연장됐다. 해고자들에게 분노와 절망이 엄습했다. 밤새 아내와 이야기하며 울기도 했다. 그렇게 또 하루하루가 절망스럽게 가고 있다. 이번엔 정말 복직이래서, 직장을 관뒀고 이사도 왔는데 어쩌나 싶었다고 한다. 아이들과 아내와 평택으로 다시 돌아와 삶을 꾸리는 게 꿈만 같았는데, 정말 하룻밤 꿈처럼 흩어졌다.
10년 중 또 한 해가 갔다. 47명의 미복귀자들은 내년이면 해고 11년 차다. 노동조합은 현장 배치를 대기 중이었던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공장 안에서는 사회적 합의를 이렇게 깰 수 없다며, 공장 안에서 함께 회사를 살려가자는 동료들이 선전물을 내고 피케팅을 시작했다. 많은 시민들은 또다시 시작된 합의 파행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시 손에 손을 잡는다. 음습한 겨울밤을 함께 넘으며 희망을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