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목도리를 하고 털양말을 신은 '평화의 소녀상' 앞에 두터운 겉옷을 입은 두 학생이 나란히 앉았다. 자신들의 2020년 새해 첫날을 '수요시위'로 채우기 위해서였다. 올해 고3이 되는 김지원(19, 여)양과 한 살 어린 한서연(18, 여)양은 "2020년 첫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생각도 해보고 기억도 해보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할머니들께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도 수요시위에 올 때마다 힘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새해도 힘차게 시작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왔어요."
"수요일에 하다 보니 학기 중엔 (수요시위에) 나오기가 힘들어요. 방학 중에도 학원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웠고요. 휴일인 새해 첫날이 마침 수요일이어서 오늘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420차 정기 수요시위'가 1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인근에서 약 1시간 동안 열렸다. 새해 첫날 한파 속에서도 200여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주최 측 추산)했고, 특히 앞서 두 학생처럼 휴일을 맞아 수요시위를 찾은 중·고교생들이 많았다. 인천 연수고 학생들은 자신들이 모은 기부금을 수요시위를 주최하고 있는 정의기억연대에 전달했다.
곳곳에서 외국인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일본인 두 사람이 한글과 일본어로 "할머니의 슬픔은 우리의 슬픔이다. 일본사람은 사실에 의한 역사를 배워라"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기도 했다.
"2020년, 정대협 30주년... '김복동의 희망' 이뤄지길"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마이크를 잡고 2020년의 의미를 힘주어 말했다. 그는 "2020년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의기억연대 전신) 30주년의 해이고 다음 주면 수요시위를 시작한 지 만 28년이 된다"라며 "2020년 첫날, 김복동 할머니가 말한 희망이 이뤄질 거란 생각을 해본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죄, 배상, 역사교육,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러한 목소리를 폄훼·방해하는 '문희상안(기억·화해·미래재단법안,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나와 있는 상황이다"라며 "지난 시절 청산되지 않는 역사에서 발생한 문제를 그대로 안은 채 2020년을 맞이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윤 이사장은 "오늘 아침 93세 길원옥 할머니께서 '잘못한 걸 뉘우쳐야 사람이지'라고 말씀하셨다"라며 "새해 소망으론 남북통일을 이야기하시기도 했다. 이 땅에 평화가 와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그 위협을 우리가 물리쳐서 다시는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소망이 우리가 꿈꿔야 할 새 소망이 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수요시위에선 2010년 1월 2일 세상을 떠난 고 김순악 할머니를 기억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1928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7세 때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공장에 갔다가 만주로 끌려가 피해를 입었다. 1945년 해방 후, 밤낮없이 걷는 등 고난 끝에 서울로 돌아온 김 할머니는 미제 장사, 식모살이, 냉면 장사, 농사일 등을 하며 살다가 2000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이날 수요시위에 참석한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만나 "1월 1일은 무언가 다짐하기 좋은 날이잖나"라며 "이제 (생존 할머니들이) 스무 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의 과거를 잊지 말고 할머님들의 정신을 잊지 말자'라는 다짐으로 한해를 시작하고 싶어 오늘 수요시위에 참석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2020년은 정대협 30주년의 해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개인의 불운 혹은 숨겨야 할 수치스러운 역사가 아닌 과거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 전쟁범죄, 여성인권 침해범죄라고 전 세계에 알린 성취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한편으론 30년 동안 피해자들이 길거리에 나와 문제를 환기하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했음에도 가해자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너무도 안타깝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수요시위를 주관한 서울 평화나비 네트워크와 참가자들은 성명을 통해 "지난 2019년 다섯 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피해 생존자 수는 단 스무 분이다"라며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이행 없이 문제는 결코 정의롭게 해결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까지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수요시위는 1992년 1월 8일부터 주한 일본대사관 앞(2011년 12월, 정대협이 이곳에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설치)에서 매주 수요일 정오에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