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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와 시민들의 연대와 도전으로 2008년부터 민법상 호주제도가 사라지고 가족관계 등록제도가 도입됐습니다. 그러나 부성주의 조항이 남아 있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엄마 성을 쓰는 일은 여전히 낯설어 보입니다. 2000년 호주제 위헌소송이 제기된 지 20년이 지난 올해,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로 한 이수연님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호주제 폐지의 의미와 과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편집자말]
똥싸개 제나야, 안녕!

아빠 박기용과 엄마 이수연은 2019년 12월에 태어난 너에게 아빠 성이 아닌 엄마 성을 물려주기로 결정했어. 그래서 네 이름은 '이제나'란다. '제나'는 순우리말로 '제 자신'이라는 뜻이라는데, 네가 세상의 기준에 끌려가지 말고 스스로 선택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단다.

네가 커서 이 글을 읽고 이해할 때에는 엄마 성을 따른 것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냥 쿨하게 "난 엄마 성인데, 넌 아빠 성이구나", "응, 우리 엄마 아빠가 가위바위보로 정했대" 이런 대화가 가능하길 바라본다. 아니, 가족 간에 중요한 건 성이 아니라 함께 한 시간과 마음이니 엄마 성, 아빠 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2020년 한국사회에서는 '엄마 성 쓰기'가 아직 낯선 일이야.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과 설득이 조금은 필요해. 특히 명절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면 잘 준비된 설명이 필요하지.

(사실 아빠는 친척 어른들이 이 모든 사실을 아는 날, 따귀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단다. 그 전에 집안의 제사를 없애버린 일로도 따가운 눈총을 받은 전력이 있거든.)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이 글을 쓴다. 네 이름을 불러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선택을 이해해주길, 또 우리와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가 네 이름을 좋아해주길 바라면서.

"아니, 그게 가능해?"
 
 호주제 폐지안이 통과된뒤 여성단체관계자들이 국회 기자실에서 호주제폐지축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평등가족만세`를 부르고 있다.
호주제 폐지안이 통과된뒤 여성단체관계자들이 국회 기자실에서 호주제폐지축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평등가족만세`를 부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우선, 많은 사람들이 '엄마 성 쓰기'가 가능한 일이냐고 물어봤어.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아이가 아빠 성을 따르도록 '부성주의'를 규정하고 있는데, 2005년 이 조항이 성 결정권을 제한하고 양성평등의 원칙과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어.

당시 헌법재판관 8명 중 5명이 헌법불합치, 2명이 위헌, 그리고 오직 1명만이 합헌으로 봤어. 그래서 2008년 부모가 합의할 경우 엄마 성을 따를 수 있다는 단서를 붙이는 것으로 해당 법 조항이 개정 시행되면서 엄마 성 쓰기가 법적으로 가능해졌지.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민법 제781조 1항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더라고. 사실 아빠와 엄마도 이런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된 건 2017년 경이었어. 기자인 아빠가 여성가족부를 취재하다가 알았어. 법이 개정되고 10년이 지나서야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거지. 자녀의 성을 부모가 상의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알려져야 할 것 같아.

이미 다수의 국민들은 부성주의가 불합리하다 생각하고 있어. 2018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자 약 3000명 중 67.6%가 '부성주의 원칙은 불합리하다'고 답했고, 71.6%가 '자녀의 성은 (무조건 아빠 성으로 할 게 아니라) 부모가 협의해 선택해야 한다'고 답했어.

엄마와 아빠가 함께 아기를 만들고 기르는데, 심지어 물리적인 임신과 출산은 엄마가 감당하는데 무조건 아빠 성을 따라야 한다고 제도로 강제하는 건 부당한 일이지. 그렇고 말고.

이런 흐름은 국제적이기도 한데, 일본은 70년 전에, 중국은 40년 전에 부성주의 원칙을 없앴어.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은 우리 정부에도 부성주의를 폐지할 것을 계속 권고하고 있어.

"굳이 그렇게 해야 해?"

사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전혀 대단한 게 아니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는 일이고, 제도적으로 열려진 선택이었거든. 사람들의 인식과 제도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사회 곳곳에서 싸워온 사람들의 노력에 비하면 우리의 선택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 게다가 엄마와 아빠가 서로 의견이 맞았고,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끝까지 반대하시긴 했으나 결국은 우리의 고집에 져주셨거든.

그래서 굳이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질문을 되돌려 주고 싶어. "굳이 안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인데"라고.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지난 2003년 5월 23일 열린 유림들의 호주제 폐지 반대 집회.
지난 2003년 5월 23일 열린 유림들의 호주제 폐지 반대 집회. ⓒ 남소연

"성씨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 차원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구성원의 위상을 결정하는 것", "(부성만을 고집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가계에 편입하고 부계 혈통을 이어가는, 부차적이고 도구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는 것" -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

여전히 여성은 다양한 차별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어. 여성이 아버지, 남편,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여성은 집 안팎에서 돌봄노동을 전담하고 있으며, 여성의 신체와 태도는 평가받고 규정 당해.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 통계청의 '2018년 임금근로 일자리 소득 결과'에 따르면 남성 평균 소득은 347만 원, 여성은 225만 원으로 남성이 여성의 1.5배 수준이야.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심하지.

우리 제나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숱한 편견의 굴레와 싸워야 할 거야. 운동장은 여전히 한참 기울어져 있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럴 테니까.

그런 너를 위해 아빠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 서로에게 평등한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같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다양한 움직임에 힘을 보태는 거지.

엄마 성을 물려주자는 결정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 마치 길에 휴지를 버리지 않듯이, 한 달에 몇 만 원이라도 시민단체에 후원금을 보내듯이, 빠지지 않고 투표장에 나가듯이, 엄마와 아빠가 할 수 있는 작고 일상적인 실천의 하나야.

우리의 선택을 통해 여성도 자녀에게 성을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데 기여하고 싶어. 그래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별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이것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는 건 아니야. 남성과 같은 권리를 여성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우리 사회가 모두에게 '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줄 수 있겠지.

사실 우리는 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우리 가족만 보아도 할머니는 정씨, 외할머니는 강씨, 엄마는 이씨, 아빠는 박씨, 너의 사촌언니들은 홍씨잖아. 할 수 있다면 아예 성을 안 쓰는 선택을 했을 거야.

"사람들이 오해해"

우리의 선택이 의미 있다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았어. 아빠와 아이가 성이 다르면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거야. 무슨 오해일까? "쟤는 아빠가 없나 보다", "쟤네 아빠는 친아빠가 아닌가 보다" 이런 오해겠지.

이런 생각은 한부모 가정이나 이혼-재혼 가정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고 있어. 더불어, 결혼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함이 깔려 있지. 아빠가 없으면 무슨 문제가 있나? 아빠가 친아빠가 아니면 뭐 어때서? 결혼하지 않고 살면 어때? 동성 부부이면 어때? 누가 나의 가족인지는 내가 정하면 되는 거지.

앞으로 가족의 형태는 더 다양해질 테고 그걸 수용해야만, 저출산과 1인 가족 증가 등의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어떻게 아빠와 자식이 성이 다를 수가 있어?"  

간혹 우리의 선택에 하늘이 무너진 듯 놀라는 분들도 있어. 부성주의라는 기존의 규칙이 절대불변의 명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당연히 아빠 성을 따라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

하지만 대체 그게 왜 당연한가? 어떤 과학적 이유라도 있나? 설마 대가 끊긴다든지 혹은 혈통관계의 구분을 위해서라든지와 같은 비합리적 이유는 아니겠지. 이런 분들에게는 엄마 성을 따라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수밖에.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제한되는 일을 두고 당연하다고 말해서는 안돼. 세상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항상 의심하렴. 누구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인지.

당연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는 낡은 그물들이 많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일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더구나.

우리는 너에게 성이 아니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가자는 가치를 전해주고 싶어. 사실 엄마 아빠의 주변인 중 거의 대부분은 엄마 성 쓰기에 대해 '대단하다', '멋있다'라고 말해줬어. 자녀가 여러 명일 때 절반씩 엄마 성과 아빠 성을 따르도록 하면 좋겠다는 이들도 있었어. 매우 합리적인 생각 아니니? 그런 반응이 큰 힘이 되었단다. 너도 자신있게 네 이름에 대해 말하기를 바란다.
 
 혼인신고서 양식 4번 항목은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혼인신고서 양식 4번 항목은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 대한민국 법원

지금의 '엄마 성 쓰기' 제도는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해. 출생신고가 아니라 혼인신고를 할 때 결정해야 한다는 불편함도 있고, 부성주의를 원칙으로 깔고 예외적으로 엄마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근본적 문제도 존재하지.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들이 있긴 해. 문재인 정부에서는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에서 부성주의 원칙을 폐지하고 부모 간 협의를 원칙으로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고(http://bitly.kr/QcKegowF),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이를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어(http://bitly.kr/2DMQemDr).

엄마와 아빠도 이런 움직임에 힘을 더하려고. 그래야 제나가 사는 세상이 나아질 테니까. 그러니 너도 구김살없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주길!

- 2020년 1월 설날, 아빠 엄마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도 실립니다.


#호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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