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처음으로 일본 여행을 갔었다. 혼자서 가는 첫 해외여행이라는 즐거움에 들떠 신주쿠나 하라주쿠 같은 이런 저런 장소를 신나서 걸어 다니는데, 거의 50m에 한 번씩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너 정말 예쁘다." "잡지에 나와볼래?" "모델 한번 해볼래?" "배우에 관심 있어?" "돈 벌게 해줄까?" "연락처 좀 알려줘." "잠깐 차 한잔 할 수 있어?"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많이 어렸던지라 당연히 저 모든 말을 거의 진심으로 믿었다. 우쭐했고, 기분이 좋았고, 이것들이 예쁜 건 알아가지고!!! 하는 현실감각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었다. 다만 나는 여행객이었고 뭐 제의를 수락한들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그저 무시하고 앞만 보고 걸어갔지만.
나중에 일본 친구들에게 나 신주쿠 갔었는데 이렇게 스카우트 당했어, 헌팅 당했어, 고백 받았어, 란 식으로 자랑을 한 뒤에야 그 모든 헌팅이며 스카우트며 고백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너 다행인 줄 알아. 따라갔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그런 사람들 누군 줄 알아? 다 AV(Adult Video) 스카우터야. 그렇게 모델 시켜준다고 데려가서 계약서 쓰게 하고선 나중에 엄청나게 벗겨먹는다고. 스튜디오 같은 데서 강간 동영상 찍게 만들고 그런 다음에는 빠져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게 만든단 말이야.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안 따라가길 천만다행이야. 인생 망칠 뻔했어."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라도 내가 그런 헛된 칭찬을 듣고 조금만 더 우쭐했더라면, 아주 약간만 더 호기심이나 모험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혹은 진짜로 모델이나 배우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배경이 해외라는 특수상황이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모르므로. 정말로 다행이라고,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n번방 사건이 터진 후 이 사건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이게 '야동'도 아니고!" 하는 말을 한다. 엄정한 계약 이후에 촬영하는 야동과 다르게 어찌 '일반인'을 대상으로 저런 야만무도한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런 짐승같은 놈들이 우리 사이에 섞여 있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끔찍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여전히 텔레그램에서 일어나는 2차가해
그런데 이분들은 모르고 있다. 속칭 야동, 혹은 AV로 불리는 포르노 영상의 일부는 n번방에서 촬영된 스너프 필름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물론 AV 모델 중에는 적극적으로 자유의사를 발현하여 자신을 거의 중소기업 수준의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어 엄청난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연히' 사탕발림에 낚여 불공정 계약을 맺고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해 폭력적인 환경 하에서 거의 성노예 수준의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계약"에 묶인 결과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 이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포르노배우들이 이토록 성에 착취 당하고 있습니다! 란 호소문을 누군가 올려도 그것은 아주 쉽게 무시 당하곤 한다. "그 사람들 전부 자기가 원해서 찍은 거잖아요." "그건 합법적인 거잖아요." "난 돈 냈는데, 그 사람 생계에 도움을 줬는데 뭐가 잘못이죠?"
놀랍게도 지금 n번방의 피해 소녀들을 두고 거기 참여했던 참가자들 역시 정확히 비슷한 말을 한다. 텔레그램에서는 여전히 "(성착취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하는 게 어이 X도 없다" "남성들은 (n번방 피해자와 달리) 죄도 안 지었는데 욕먹는다"(23일 뉴스1 보도) 등의 말이 나온다고 한다.
변태성욕자가 아니라 '평범한' 남성들
성산업을 둘러싼 담론은 이와 같이 매번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포르노 영상을 둘러싸고, 성매매 여성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 클럽에 갔다가 약물에 취해 강간당한 여성을 둘러싸고, 랜덤채팅 앱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출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한 미성년자 성매매를 둘러싸고, 매번 놀라울 정도로 같은 설명과 변명이 반복된다. 여성들이 자초한 것 아닌가요? 왜 빌미를 제공하나요? 동시에 외부에서는 늘 같은 비판이 반복되기도 한다. '저 짐승 같은 놈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인간 쓰레기들, 사이코패스들, 변태 성욕자들. 저놈들을 다 잡아서 죽여야 돼.'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n번방에 참여한 남성들이 "사이코패스" "변태성욕자" "또라이들"은 아닐 거라는 점이다. 클럽에 갔다가 필름이 끊긴 여성과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하룻밤을 보낸 남성들처럼, 카톡방에 친구가 올려준 '일반인 몰카'를 또 다른 친구에게 공유해준 남성들처럼, 훌륭한 '품번'을 서로 공유하는 남성들처럼, 여중생을 공유했다는 유명인의 '추억'을 듣고 "물론 잘못됐지만 남자놈들 어릴 때는 다 철이 없고 한두 번쯤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그들 역시 그냥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남성들일 거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n번방 사건은 n번방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n번방 참여자들은 반사회적이며 반인권적인 범죄, 인권이 파괴되고 착취 당하는 현장을 방조한 공모자들임에 틀림없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와중에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모든 것과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여성을 대상화하고, 물건처럼 대우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 공공연한 담론으로 삼는 기존의 사회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부터 반복되어 온 유구한 전통(?)을 고려하면 이는 인간의 도덕심이나 이타심이나 배려심 등에 기대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할 고민은, 어떻게 남성 일반에게 "당신도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를 설득시킬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제도를 만들어낼 것인지, 어떻게 그러한 제도를 만들어낼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인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