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사이타마 현에서 유치원을 비롯한 어린이 시설에 마스크를 나눠주면서 조선학교를 제외한 일이 이슈가 되었다. 조선학교 관계자들은 시청으로 찾아가 항의를 했다. 이는 마스크 몇 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을 단면으로 보여주는 예이며,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대한 독립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자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특이하게도 재일교포가 아닌 1.5세대 재미교포 이민진이 쓴 <파친코> 1권과 2권을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최근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흡인력 있게 읽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추천한 책이다.
단 두 권이지만 박경리 작가나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저자가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들을 세세하게 풀어놓은 점이 놀라웠는데 예일대 역사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민진은 일본계 남편이 도쿄로 발령이 나 4년 간 그 곳에 살면서 조선인들 수십 명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소설을 30년에 걸쳐서 썼다는 점이다. 얼마나 많이 고치고 쓰기를 반복했을까. 그 노고에 숙연해진다. 이민진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기업 변호사로 일하며 한인 이민자 사회의 성공 모델이 되었는데 건강이 나빠져 글 쓰는 일로 살게 되었다. <파친코>는 출간 되자마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대 석학교수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김성곤은 <파친코>에 대해, "20세기 한국과 일본을 조망하고 기록한 중요한 사회문서이자 값진 문화텍스트"라고 평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파친코>는 주인공 선자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파란 많은 우리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소설이다. 일본의 멸시와 차별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내기도 하고, 희생도 당하고, 스스로 무너뜨리기도 하는 선자 일가족의 삶은 불가항력이었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으며, 한계를 넘어설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읽는 동안 그들과 같이 고통스러웠고, 분노가 일곤 했다.
부산 영도의 가난한 하숙집에서 태어난 선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도우며 산다. 장을 보러갔을 때 조언해준 생선가게 아주머니 말이 선자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근사한 삶을 살게 되고, 나쁜 남자를 만나면 저주받은 인생이 시작되는 거레이. 그래도 우야든둥 여자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아이가. 항상 일을 해야 한데이. 가난한 여자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가. 기댈 건 우리 자신뿐이다 이기라."
(49쪽)
'한수'라는 야쿠자를 만난 것이 선자의 저주받은 인생이고, 목사 이삭이 선자를 품어 결혼하게 된 것은 근사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사카로 넘어가 마주한 살림은 거친 일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평생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산 선자는 어떤 일이 생겨도 주저 없이 해내는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조선인의 판잣집 마을에서 선자 가족의 삶이 둥지를 튼다.
2세, 3세가 되어도 그들이 받는 차별은 바뀌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조선인이라는 놀림과 따돌림을 받는다.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와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 아직도 일본의 많은 곳에서는 교포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 등으로 고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인기 게임장인 파친코 시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부와 신분 상승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선자의 손주 솔로몬 역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자신을 아끼는 줄 알았던 일본 상사에게 배신과 함께 해고를 당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파친코 가게에 들어간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다."(95쪽)
'파친코'를 소설 제목으로 한 이유를 위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꾸불꾸불 미로 같이 박힌 철사 길에 구슬을 튕겨 운을 기대하는 확률에 희망을 거는 파친코 게임은 예측 불허한 재일교포들의 삶을 상징한다. 파친코는 폭력과 연결되어 있어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없지만 그들의 선택지는 별로 없다. 성실과 능력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선자 자녀들이 그랬듯이 재일교포들은 정체성에서도 혼란을 겪는다. 일본에서는 조선인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취급 받는 이방인 신세다. 어디에서든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도쿄의 한 대학에서 '인권과 마이너리티'라는 과목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서경식 교수는 많은 젊은이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며 느낀 점을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선량하고 기특한 학생이지만, 사회와 정치 현사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무관심이라기보다 관심을 가질 회로마저 단절당한 채 성장한 사람들로 보인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은 타자를 해치고 자신도 해치게 될 것이다. - <시의 힘>, 90쪽
일본 젊은이들이 정치 감각에 관심이 없어 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니 일본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다. 소설에서도 일본은 변하지 않으며 외국인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재일 조선인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 권력자들이 국민의 적으로 만들어내는 희생물이 될 수 있다고 서경식 교수가 말한다. 재일 조선인에게 고향은 국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 아프다.
재일조선 관계자들이 3일에 걸쳐 강력한 항의 투쟁을 하고, 내외 언론과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사이타마 시에서는 조선학교 유치원에도 마스크를 배포하기로 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엊그제 뉴스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공적 마스크를 살 수 없는 처지를 호소했다.
우리나라 국민은 역사적 피해로 일본에 대해 특수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파친코>을 읽는 동안 진한 감정선들이 속을 훑으며 지나다닐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공적 마스크를 두 번 사는 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감정들과 연결 지어졌다.
오로지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염려만을 하며 걸음을 재촉한 내게, 이젠 우리의 피해 의식을 넘어 시선을 넓게 두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선자'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고 있을 것을 말이다.
<파친코>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재일조선인의 한 일가가 벌이는 생존의 역사가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들을 대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독자들에겐 주위를 돌아보게 보고 그들을 향해 한 줌 햇살과도 같은 시선을 보내도록 이끌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