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의 한글운동에 '썩은 선비' 부류가 아닌 국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비판하고 나왔다. 자산(自山) 안확(安廓)이다. 주시경보다 10년 아래였으므로 서로 만났을 수도, 또는 그의 강의나 저서에 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확은 '주씨 일파의 곡설(曲說)'이라는 심한 표현까지 썼다. 먼저 이와 관련 한 논고를 살펴보자.
편의상 명칭 문제에 대해서 먼저 말하면 자산은 '한글'이란 새 이름을 짓는 일은 부질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컨대 '언문(諺文)'에는 한자에 비하여 낫 게 보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꺼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던 듯, 그는 내처 '언문'을 고수했으며 논문(22)에서 그의 생각을 요약하여 표명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자산은 먼저 "세종대왕이 흠정하기는 훈민정음이라 하였으나 실층으로는 언문이라 하였다"고 지적하고 "언문이라 함은 고대인의 성명과 여한(如)한 것이니 후인이 그것을 변작한다기는 심히 괴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언문을 '한글'이라 개명하는 것을 "평민이 양반을 선망하여 행렬자로써 본명을 개(改)함"에 비유하면서 이런 개명으로 그 가치가 "천하세계에 제1대문자"가 될 리는 만무하다고 꼬집기도 하였다. (주석 12)
일제강점기 『조선문법』과 『조선문학사』, 『조선문명사』 그리고 해방 뒤 『조선평민문학사』등을 저술하고 국학 전반에 걸쳐 정력적인 연구를 해온 안확은, 1914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학과에서 수학하고 조선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에 「조선어의 가치」를 발표하였다.
근대 주시경 씨가 출(出)하여 차(此)에 전력하고 우(又) 학생으로 하여금 언어 연구열을 고취한지라. 연(然)이나 씨는 불행히 조서하였으며 기타 학자는 혹 어음(語音)을 성지(聲理)로 해(解)치 않고 문자형을 의하여 해(解)하며 우 혹자는 현대 수만의 외래어를 일절 폐지하고 고대어를 사용하자는 곡론(曲論) 불합리설을 창(唱)하므로 상금까지 진정한 언어학자가 무 (無)하여 신성한 조선어로써 만어(蠻語)가 되게 하고 오히려 외국학자에게 그 연구를 양(讓)케 되었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주석 13)
안확은 주시경의 '한글' 이름 짓기에도 못마땅했던 것 같다.
"언(諺)은 곧 문기어(文記語)가 아니요 구음어(口音語)라 함이요 우(又)는 성인의 특훈이 아니요 민중의 격언이라 함이라 차는 양의(兩義)에 빙하여 언문의 본의를 해하면 표음문자로서 사회일반에 통합한 평면적의 문자라 할 것이다." (주석 14)
"안확은 '언문'이 도리어 민중의 문자를 부르는 명칭으로서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은 '한글'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언문'의 본의도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니, 자산(自山)의 해석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석 15) 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안확의 「주씨 일파의 곡설」의 결론 부문은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주씨 일파의 곡론은 문자와 언어를 혼용하며 어떠한 감정에 자함(自陷)하여 괴벽한 언론을 주장하니 학생에게 취하여는 오히려 해만 있는 이는 없는지라, 관컨대 조선어는 조선문으로 기(記)하여야 된다 하여 조선문법은 조선 본토어만 사용하기로 목적한다 하는 피견은 실로 정구죽천(丁口竹天)이라.
여차한 무리의 주장으로서 학생을 교(敎) 하였으매 이래 10년 래 조선 문법을 학(學)한 학생은 오직 기로에 함하여 도리어 귀찮은 감상을 기(起)하여 문법의 원리 원칙은 하나도 불지(不知)하게 된 것 같더라. (주석 16)
주석
12> 이기문, 「안자산의 국어연구, 특히 그의 주시경 비판에 대하여」, 『주시경 학보』 제2집, 91~92쪽.
13> 안확, 「조선어의 가치」, 『학지광』, 1915년, 여기서는 이기문 앞의 책, 88~90쪽, 재인용.
14> 이기문, 앞의 책, 92쪽, 재인용.
15> 앞과 같음.
16> 앞의 책, 96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