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8일부터 2월 25일까지 페루 도자기 여행을 다녀왔다. 2월 첫 주 페루의 쿠스코주, 피삭에서 열린 제1회 라틴도예가들의 축제 '잉카 길의 흙(Barro del Qhapaq Nan)' 참여를 시작으로 그곳에서 인연이 된 도예가들과 남미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연이 닿은 '흙'을 재료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여정은 짧게나마 '잉카의 길'을 걸어보는 시간과 같았다. 그 만남의 이야기를 담았다.
*Qhapaq Nan이란, 페루 원주민 언어 케추아어로 '잉카의 길'을 뜻한다. 'qhapaq'는 '부'를 의미하고 'nan'은 길을 의미하여 '부의 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잉카 제국시절 새로이 만들어진 길이 아닌 이미 존재했던 길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4만 킬로미터가 넘는 길로 알려져 있다. [기자말]
"도자기와 망고, 레몬의 땅, 출루까나(Chulucana)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페루 북쪽 도시 피우라에서 로컬버스로 한 시간 남짓, 마을의 입간판이 페루 도자기 여정의 마지막 정거장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도자기로 유명한 마을에 들렀을 때 흔히 보아왔던 풍경을 당연하게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마을 곳곳엔 대표 도자기들이 보이고 모든 골목은 아니어도 메인 광장에는 도자기 공방들과 상점들이 펼쳐져 있는 풍경 말이다.
하지만 출루까나는 그렇지 않았다. 환영 입간판에 쓰여 있던 '도자기의 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도자기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덥고 건조한 북쪽 지역이 아니던가. 황량하기까지 한 풍경은 나를 적잖이 당황시켰다.
초조한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는데 오토바이 택시 툭툭을 타고 나타난 누군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페루 지인의 소개로 하루 이곳을 가이드해주기로 한 도예가 알렉산더 소사(Alecsander Calle Sosa, 아래 알렉스)였다. 저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곳에서는 헛걸음을 하고 돌아섰겠구나. 반가움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오늘 제가 출루까나 도자기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줄게요."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그런 시간이 있기는 할까? 그렇게 툭툭은 마을의 가운데로 달려갔다.
도자기 마을 출루까나의 이야기
마을 첫인상에 대한 나의 궁금증에 알렉스는 툭툭을 타고 가며 짤막하게 출루까나 도자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후 몇몇 도예가와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가 보태졌다. 그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도자기로 유명하다는 이 마을, 출루까나의 도자기 부흥기는 그렇게 오래되지도 길지도 않았다.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인 것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 이곳은 '도자기의 땅'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고 너다섯 가족만이 대를 이어 마을에서 쓰이는 식기나 화분 등을 만들어 팔았다.
이곳에 '도자기'라는 수식어가 추가된 것은 1967년 미국에서 온 글로리아(Gloria joyce) 수녀에 의해서 였다. 평소 원주민 역사와 문화, 수공예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2000년 이전 페루 북쪽 비쿠스(vicus) 문명에서 발견된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고 마을 도예가 중 재능있는 세 젊은이를 격려하여 "Sanoc Camayoc"(고대어로 '도예장인들'이라는 뜻)라는 그룹을 만들도록 도와주고 지원했다.
젊은 도예가들은 고대 도자기를 연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출루까나만의 도자기 디자인과 장식기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는 글로리아 수녀에 의해 미국과 이탈리아 등 해외로 알려지게 되면서 출루까나 도자기의 붐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중후반의 일이었다.
이후 해외의 판매 중계상들이 출루까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너다섯 가족이던 도예가는 천여명으로 늘었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도자기가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도자기를 배워 그 일을 시작했고 다른 지역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그렇게 찾아온 전성기는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당장 돈벌이에 집중한 중계상들은 이 작은 마을이 감당할 수 없는 수량을 요구했고, 그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사람들은 질보다는 양적 생산을 위한 편리성에 의존하게 되면서 도자기의 질은 점점 떨어졌다.
결국 시장에서도 이전과 같지 않은 출루까나의 도자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됐다. 한번 잃어버린 질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고 2007년 이후 점점 출루까나의 도자기는 시장에서 잊혀지며 오늘에 왔다.
10여 년 출루까나의 도자기 붐은 수공예 중계상들을 부자로 만들었을 뿐 부흥기가 끝난 마을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도자기로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본인의 마을로, 본인의 업으로 돌아가고 지금 이곳에서 도자기를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출루까나 도자기 부흥의 시작, 도예가 헤라시모 소사
출루까나 도자기 부흥의 시작이었던 젊은 도예그룹 멤버 중 메인이며 지금의 출루까나 도자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네거티브 장식기법(흙과 망고 잎을 활용한 훈연의 과정으로 무늬와 색을 입히는 기법)과 조형으로서의 도자기 디자인을 완성한 도예가 헤라시모 소사(Gerasimo Sosa)의 작업실이 출루까나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지금도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작업실은 한 지역의 부흥기를 가져왔던 시작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공간 한켠에 자리잡은 그의 아름다운 도자기는 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전통도자기를 만드는 분이었지만 나는 항상 새로운 도자기 작업에 관심이 있었어. 하지만 방법을 몰랐지. 스무살 때 글로리아 수녀를 알게 되면서 많은 것이 변했지. 그녀는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는 나의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도자기 역사를 만들기로 했어. 그리고 해냈지."
헤라시모와 두 명의 도예가 친구들은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을 연구하고 이를 완성해갔다. 그들이 완성시킨 도자기는 페루에서는 유일하게 '원산지 인증'을 받으며 그 독창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출루까나 도자기'라고 알려져 있는 대표 모델들은 대부분 헤라시모 도예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헤라시모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말한 것, 할 것,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할 수 있었던 때'였다고 그 때를 회고했다.
그 끝 혹은 다른 길
"헤라시모 장인을 출루까나 도자기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나는 마지막이라고 해야할지도 몰라요."
하루 안내를 맡아준 도예가 알렉스는 스스로 출루까나의 마지막 도예가라는 씁쓸한 수식어를 붙였다. 그 이유는 이제는 이곳 젊은이 중에 도자기를 배우거나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란다.
알렉스는 페루의 수공예 공정무역 단체와 출루까나의 도자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한번의 붐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지속해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알렉스의 공방에서 보는 도자기는 헤로시모 소사의 작업실에서 보던 이전 출루까나의 도자기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출루까나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과 판매를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 판단이죠. 전통기법인 네거티브 장식기법을 살리지만 디자인은 보다 현대적으로 만들고, 다량 생산을 위한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는 과정도 필요해요."
알렉스가 이야기하는 출루까나 도자기의 변화와 혁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지역 전통방식인 팔레떼오(paleteo, 우리나라 판치기와 유사한 기법)로 도자기를 만들던 것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에서 전기 물레하는 사람들을 데려와 기술을 익혀 생산방식을 변화시키면서 지금은 팔레떼오를 할 수 있는 도예가들이 거의 사라졌다.
효율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라는 입장이 있는 반면, 수공예는 완성뿐 아니라 과정의 아이덴티티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출루까나 고유의 도자기를 잃어간다는 비판도 동반된다.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변화할 수 있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의 경계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내일의 출루까나는 어떤 수식어를 갖게 될까?
페루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출루까나는 개인적으로 많은 질문을 남긴 여정이었다. 어느 지역의 전통 수공예가 건강하게 지속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통을 보존하는 방식은 생산력이 없다. 그럼 적게 충분한 가치를 받아 팔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우리의 시장논리가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다량 생산을 하게 되면 결국은 공장시스템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수공예의 가치를 잃는다. 구매자의 요구에 맞추어 생산하는 것은 사실 수공예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렇다고 안 팔리는 공예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내가 만난 출루까나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역사로 경험한 곳이었다. 10여 년의 짧은 시간 흥망 속에서 그 모델이 된 곳이었고 지금 내가 과연 답이 뭘까 고민하듯 이들 또한 이 쇠락의 곡선을 어떻게 바꾸어야 가장 좋은 답일지를 쉽게 찾고 있지는 못한 듯했다.
농부들은 다시 밭으로 돌아갔고 몇 남지 않은 도예가들은 과거의 영광에 기대거나 미래의 희망을 찾으며 살아간다. 몇 년 후 다시 출루까나에 왔을 때 '도자기와 망고와 레몬의 땅'이라는 입간판이 어색하지 않도록 마을의 곳곳에 그들의 도자기를 볼 수 있을지, 입간판에서 '도자기'라는 단어가 다시 사라지게 될지 그 미래를 조금은 아쉽게 그려보게 되는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