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원도 한 농가에서 코로나19로 판로가 막히자 농사 지은 감자의 판매를 포기하고, 무더기째 방치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버려진 감자 더미 속에서 때아닌 공짜 감자를 주워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밤새 시골 마을이 들썩였다는 소식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빈 밭에 수북하게 쌓인 감자를 놓아두고 돌아서던 그 농민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우리는 지금 먹을 것이 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귀한 줄 모르고, 먹을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것들을 키우고 가공하고 배달하고 조리해주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 또한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작년 이맘때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읽었던 책 한 권이 불현듯 생각났다. 먹을 거리에 대한 기원을 세계사와 연관 지어 알기 쉽게 또 재미있게 전달하는 청소년 도서 <식탁 위의 세계사>가 바로 그것이다.
감자는 오늘날 유럽 요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재료가 되었지만, 본래 남아메리카의 적도 부근에서 재배하던 식물이야. 그러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스페인 탐험가들이 유럽으로 가져간 거지. 그런데 처음 들여왔을 때는 유럽 사람들이 전혀 좋아하지 않았대. 컴컴한 땅속에서 자라니까 음침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야. (...)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감자 보급에 애썼다는 기록이 있어. 1770년 프랑스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각했을 때 감자 덕분에 겨우 어려움을 극복했대. 그래서 이듬해인 1771년 프랑스의 한 아카데미에서는 파르망티에라는 농학자 겸 화학자에게 상을 수여했어. 감자를 소개하고 감자 재배를 장려한 공으로 말이야. 그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감자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보내자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이를 따라 했다는 일화도 있어. - <식탁 위의 세계사 > 14~17p.
감자를 주식으로 삼던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찾아 왔을 때,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이를 외면했고 원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도움만을 적선하듯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고, 훗날 아일랜드 역사에도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는 '감자 대기근'이 지나고 난 뒤에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불 번지듯 번져 나갔다. 감자가 없어 굶어 죽어간 아일랜드 사람들을 돕지 않은 영국에 대한 불만이 아일랜드 독립의 도화선이 된 셈이니, 감자의 힘이란 이 얼마나 위대한가.
'식탁 위의 세계사'에는 감자뿐 아니라 차, 옥수수, 빵, 닭고기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은 다양한 식자재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떤 한 식자재의 기원과 배급에는 우리가 그동안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환경과 에너지, 정치, 경제에 관한 뒷이야기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가볍고 유쾌하게 적고 있어서 청소년 권장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읽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바나나에 얽힌 제3세계 노동자들의 인권 유린과 환경 오염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쩐지 마음 한편이 숙연해진다. 우리는 정말 오로지 먹기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인간도, 또 자연도.
우리가 아는 바나나는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과일이지만 동시에 대표적인 오염 작물로 알려져 있어. 왜 그럴까? 먹고 나면 껍질을 아무 데나 버려서? 아니란다. 살충제나 제초제 따위를 많이 사용해서야. 사실 바나나를 생산하는 제 3 세계의 농장들은 대부분 대형 다국적 기업 소유거든. (...) 200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정의 배심원은 돌 사에서 일했던 니카라과 농업 노동자 6명이 DBCP라는 살충제 때문에 생식 능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돌 사에 44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대. 니카라과 법정에서도 역시 돌 사와 다른 기업체들에게 DBCP 살충제 때문에 피해입은 것으로 보이는 노동자들에게 8400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하고. 살충제의 독성이 법정에서도 인정된 거야.
이 책은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듯한 편안한 구어체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다정한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친근한 느낌을 준다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코로나19로 식당과 카페 등에 대한 영업 제한이 이어지면서 다양한 식자재가 판로를 잃고 헤매는 중이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최근 확진자가 줄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진 형편이지만 전 세계 식품 수급 상황은 아직도 영어수선하다. 우유와 달걀, 채소, 과일 같은 기본적인 식자재 수요가 급감하면서 불가피하게 폐기되는 음식물들이 헤아릴 수없이 많다고 한다.
삶이 고단할 때, 맛있는 음식만큼 위로를 주는 게 또 뭐가 있을까. 누구에게나 '소울 푸드'라 불리는, 주린 영혼을 달래주는 먹거리 리스트가 하나쯤은 가슴에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식탁 위의 세계사>를 읽으면서 허기진 마음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 온 가족이 함께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이다. 그러는 사이 이 시련도 곧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