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중 일부인 이 문구였다. 옛 전남도청 앞의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와 함께 하고 있었다. '산천'만큼이나 굳건한 옛 전남도청과 40년 전 태극기가 내걸린 분수대는 여전히 그곳에 발 딛고 있었다. 245개 탄흔을 온 몸에 품고 있는 전일빌딩과 매일 오후 5시 18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내뿜는 시계탑 역시 아직도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선 40년 전 그날의 사람들은 지금도 가슴 속 응어리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전남도청에서 아들을 잃은 김길자씨는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김씨의 아들 고 문재학군은 광주상고 1학년 때 이곳 전남도청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을 나간 아들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 (전남도청에서) 심부름이라도 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아이고 우리 재학이, 여그가 나한테는 참 애틋하제라. 우리 아들이 여그서 죽었거든요. 내가 여그서 아들을 찾았어요. 길다믄 길고, 짧다믄 짧은 세월인디, 이라고 40년이 지나브렀습니다. 인자 좀 맘 편히 5월을 맞이하고 싶은디..."
전동휠체어를 탄 임영수씨도 한숨을 내쉬며 전남도청 건물을 바라봤다. 당시 27세였던 그는 그때 맞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단하고 말았다. 임씨의 목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더 몸이 불편한 다른 5.18 유공자 동료들을 위해 자신 역시 불편한 몸을 이끌고 현장 곳곳을 사진에 담고 있다.
"마음이 그저 착잡합니다. 돌아가신 분들 생각하믄 이렇게 살아서 웃고 있는 것도 웃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할 사람들은 인자 좀 사과 좀 해야 않겄습니까. 우리가 누구 헐뜯자는 거 아니잖습니까."
특별한 추념사
18일 진행된 40주년 기념식은 처음으로 옛 전남도청 앞(5.18민주광장)에서 진행됐다. 그 동안 기념식은 국립5.18민주묘역에서 열려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열린 이날 기념식은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라는 주제처럼 '기억'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날 사회를 맡은 김제동씨는 이 말로 기념식 시작을 알렸다.
"지금 저 뒤에 있는 옛 전남도청 건물은 시민과 학생, 그리고 형제와 자매와 이웃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5.18 최후의 항쟁지입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건 그 희생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토대 위에 우리가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영상엔 그 동안 5.18을 주제로 제작된 영화의 일부 장면이 담겼다. <택시운전사>의 김만섭(송강호 분)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 분)에게 "뉴스가 나가야 그래야 바깥 사람들이 알 거 아냐. 당신 기자니까 찍어줘. (죽은) 재식이(류준열 분)도 찍고 여기도 찍고"라고 호소했다.
<화려한 휴가>의 박흥수(안성기 분)는 최후 항전을 앞둔 전남도청에서 "우린 살기 위해 싸우고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당당하게 끝까지 맞서 싸웁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영화의 박신애(이요원 분)는 방송 차량에 올라.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제발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
이날 4절까지 울려퍼진 애국가 역시 특별했다. 참석자들이 3절을 부를 때 전광판에선 5.18과 관련된 영상이 흘러나왔다. 영상에는 전남도청을 지키는 시민군, 물과 주먹밥을 나르는 시민들, 헌혈에 나선 학생 등 항쟁에 동참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애국가를 부른 직후엔 문흥식 5.18구속부상자회장이 김용택 시인의 '바람이 일었던 곳'을 낭독했다. 이 추모사에 맞춰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묵념했다.
"이 세상 어느 땅에는 작고 깨끗한 태극기가 푸른 잔디 위에 꽂혀 있습니다. 돌에 새긴 이름들, 그리고 하얀 우리 어머니, 꽃 지고 피던 새 잎이 떨어지던 5월, 그 어느 날은 오늘이고 또 내일입니다. 거기에는 다 같이 고귀한 목숨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냐고 묻지 못합니다. 목숨이니까요. 해와 달, 별들이 가던 길 뒤돌아다봅니다. 이곳은 바람이 일었던 곳, 나라를 생각합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모여 사는 우리나라입니다."
여전히 청년인 남편에게, 할머니가 된 아내가
그 동안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하던 5.18 경과보고는 5.18에 대한 기억을 계승해나갈 청년들이 맡았다. 유공자 자녀 김륜이양, 차경태군은 "역사를 잊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민들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이렇습니다"라며 경과보고를 시작했다. 이들이 마지막에 남긴 말은 아래와 같다.
"광주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민주시민 의식을 보여줬고 민주주의의 불씨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 자랑스런 역사는 한동안 광주사태란 이름으로 불리며 철저히 왜곡됐고 1988년에야 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됐습니다. 2011년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고 2019년엔 5.18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이후부터 현재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진실은 결코 가려지지 않으며 정의는 항상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이 주인인 나라인 대한민국을 지키는 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진실과 마주하고 정의를 지킬 수 있도록 제대로 익히고 배워나가겠습니다."
이후엔 5.18 당시 세상을 떠난 고 임은택씨의 아내 최정희씨가 단상에 올랐다. 소복을 입은 최씨는 여전히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영정 속 남편을 향해 직접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보고 싶은 당신. 젊어선 삼남매 키우며 먹고 살기 너무 팍팍해 맥없이 가버린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이제는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뜬 당신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당신이 떠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날 일이 생생해요. 장사를 하던 당신이 광주에 수금을 하러 간다기에 저녁밥을 안치던 참이었는데 당신은 밥도 안 먹고 나가셨죠. 그런 당신은 밥이 다 되고 그 밥이 식을 때까지 오지 않았어요. 가보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당신을 찾아 헤맸는데 열흘 만에 교도소에서 시신이 된 당신을 만났습니다.
이 억울한 마음을 누가 알까요. 그래서 그날부터 당신의 일을, 광주의 일을 알리려고 곳곳을 다녔어야. 그래야 우리 아들, 딸, 손자들이 다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지 않겠어요?
여보 당신 만나는 날, 내가 너무 늙었다고 모른다 하지 말고 삼남매 반듯이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고 칭찬 한 마디 해주세요. 참 잘했다고. 보고 싶은 당신, 우리 만나는 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세요."
부부의 애처로운 사연에 많은 참석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 대통령은 단상을 내려오는 최씨에게 악수를 건넸고, 가수 김필씨가 부르는 <편지>(김광진)가 현장을 가득 채웠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오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5.18 보편성 강조한 문 대통령
문 대통령은 직후 이어진 기념사에서 '5월 정신'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또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며, 자신의 대선 공약이었던 '헌법 전문에 5.18을 포함시키는 것을 되짚었다.
문 대통령은 "5.18을 겪지 않은 세대가 태어나고 자라 한 가정의 부모가 되고 우리 사회의 주축이 되었다. 그날 광주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광주를 겪었다"라며 "5월 정신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5월 정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미래를 열어가는 청년들에게 용기의 원천으로 끊임없이 재발견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도 5.18의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 지난 5월 12일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남겨진 진실을 낱낱이 밝힐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며 "진실이 하나씩 세상에 드러날수록 마음 속 응어리가 하나씩 풀리고 우리는 그만큼 더 용서와 화해의 길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왜곡과 폄훼는 더 이상 설 길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헌법 전문에 5.18을 새기는 것은 5.18을 누구도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라며 "이제 우리는 정치·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고 나누고 협력하는 세계질서를 위해 다시 5월의 전남도청 앞 광장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그날 도청을 사수하며 죽은 자들의 부름에 산 자들이 진정으로 응답하는 길이다"라고 마무리했다.
이날 '내 정은 청산이오'란 제목의 기념공연은 씻김굿과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채워졌다. 국악인 정은혜, 김율희씨와 관현악단 더퍼스크 콰르텟, 배우 지현준, 광주시립합창단, 광주소년소년합창단 등 60여 명이 옛 전남도청 앞과 도청 옥상을 가득 메웠다. 이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 참석자들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아래의 문구가 영상을 통해 흘러나왔다.
"날 붙잡지 못한 걸 후회하지 말아요. 날 기억해 주는 것 그걸로 되었소. 어찌 우리 그 날을 잊을 수 있겠소만, 어찌 우리의 한이 풀릴 수 있겠소만. 얼마나 더 그대를 기다릴 건지 언제 우리 웃으며 또 만날 건지. 그때까지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그때까지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한편 코로나19로 인해 이날 기념식엔 400여 명만 초청됐다. 행사장으로 들어가기 전 발열체크를 진행했고, 의자도 각각 1m씩 간격을 두고 배치됐다. 유족 김길자씨는 "예전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진 못했지만 코로나19 와중에도 이렇게 기념식을 치를 수 있어 감사하다"라며 "오늘 대통령님이 말씀하신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나. 81살이 된 내가 더 나이 먹기 전에 빨리 5.18의 진상규명이 이뤄져 조금이나마 응어리를 풀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유공자 임영수씨도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과 한 마디 없는 책임자들이 우릴 힘들게 한다"라며 "그들 때문에 5.18을 왜곡하는 세력이 광주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더 이상 이 땅에 설 수 없도록 역사 왜곡을 처벌하는 특별법이 만들어졌으면 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