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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와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예술가, 그리고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과 사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철학과 고민을 엿보고 인간으로서의 좌절, 고통, 자부심, 고집을 조명해보면서 그림이 전달하는 의미와 그 너머 화가의 존재를 인식해보고자 한다. [기자말]
신고전주의 화가 데이비드의 제자 중 하나였던 앵그르는 19세기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낭만주의는 물론 리얼리즘, 인상주의 등 새롭게 등장한 신진 화가들에게 구습의 표상으로 여겨지곤 했다. 전통의 틀을 거부하는 신진 화가의 입장에서는 앵그르가 당연히 넘어서야 할 아카데미의 한계로 여겨졌겠지만, 반대로 앵그르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색보다는 선을 중요시하고 그림의 표면을 최대한 매끈하고 완벽하게 처리한 앵그르의 방식은 충분히 아카데미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앵그르는 자신만의 색깔 또한 확실했다. 모든 것을 아카데미의 룰에 따르는 모범 답안의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는 고대 그리스, 르네상스 등 고전 양식에 심취했다. 또한 스토리나 구도 보다는 개인의 심리나 인물의 형태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그린 신화의 그림은 특이한 장면과 구도로 그려지곤 했다. 그가 그린 성화는 주인공이 돋보이기 보다는 온갖 등장 인물들과 뒤엉켜 복잡하고 어지러운 양상을 드러냈다. 등장인물들 간의 어우러짐은 고사하고 각각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듯 따로따로 분리가 된 것만 같다. 특히 손동작이나 팔과 다리의 자세, 등과 허리의 뒤틀림 등 어느 하나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고 기이하고 독특한 것이 특징이다. 

그에 반해 이상할 정도로 인물의 표정은 무표정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얼굴은 아예 보여주지 않고 등을 돌리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기도 하다. 그의 작품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을 보자. 목욕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여인은 등을 돌리고 돌아선 채 의자에 걸터 앉아 있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앵그르 Source: Wikimedia Commons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앵그르 Source: Wikimedia Commons ⓒ 루브르 박물관
 
그녀의 등은 약간 굽은 채 부드럽고 매끈하다. 머리를 동여맨 타월 탓에 여린 목이 시원하게 드러나고 풍성한 둔부의 살은 바닥에 눌려 부피감이 느껴진다. 다리는 가녀린 듯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특히 오른 다리는 해부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앵그르는 이렇듯 그림을 그리면서 본인의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신체를 구부러뜨리고 늘이고 줄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여성의 누드에서 특히 그러하다. 대표작인 '그랑드 오달리스크'(1814) 속 여인은 옆으로 길게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의 등은 매끈하고 부드러운데 특히나 상당히 긴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앵그르는 어쩌면 이탈리아의 고전미, 르네상스의 완벽미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아름다움의 극한을 추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헬레니즘 양식이 그러했듯이, 매너리즘 양식이 그러했듯이, 앵그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현실의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극도의 우아함이 느껴진다. 
 
The Grand Odalisque(1814) 앵그르 Source: Wikimedia Commons
The Grand Odalisque(1814)앵그르 Source: Wikimedia Commons ⓒ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의 그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생명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흔한 아카데미의 그림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딘가 부적절할 뿐 아니라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의 그림에서 버려야 할 아카데미의 고답적인 룰만을 본다면 그가 추구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대한 처절한 갈망을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처절함은 고요하고 정적인 그림에서 더 나아가 온 몸을 비틀고 서로 뒤엉키며 고개를 빼고 손을 내미는 간절함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효과는 '터키탕(Turkish Bath)'에서 극에 달한다. 그동안 앵그르가 그린 수많은 독립된 누드들을 마치 집대성이라도 하듯이 이 그림에는 기존의 포즈를 포함하는 다양한 포즈의 여인들이 누드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체적인 느낌은 에로틱하다거나 야릇하다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낯설며 억지스럽고 과장되어 있다. 한마디로 실험적이다. 아름다움은 평범함이나 자연스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낯섦과 극단에서 오는 것인 양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앵그르의 그림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당시 아카데미를 대표하며 구악으로 여겨졌던 화가에게서 현대적인 면을 발견하는 것은 신선하고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다. 앵그르가 추구한 것은 당시 아카데미의 천편일률적인 주제와 구도가 아니었다. 앵그르는 그림이 지녀야 하는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냈다. 

"예술은 진정 새로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혁명적일 정도로 달라지고 싶다. 하지만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싸워나가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야망이다."

그가 생각하는 그림이라는 것은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캔버스에 명징한 형태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을 강조하고 매끄러운 화면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담아낸 결과물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나는 형태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이 명징하면서도 신비롭고 구체적이면서도 아련한 이유일 것이다.

#화가#앵그르#누드#미술#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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