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 2019년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주거 안전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위험의 불씨는 지금 가난한 청년들의 방을 향하고 있다. 청년 1인 가구 절반이 21세기형 단칸방인 원룸에 산다. 평균 계약 기간은 1년 반. 방 한 칸에 잠시 머무르는 청년들에게 안전은 사치다. 취재팀은 청년 주거 안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와 함께 화재·범죄 영역의 안전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예비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의 원룸 수요가 몰리는 2월, 체크리스트를 기준으로 76곳의 원룸을 살폈다.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청년들의 안전에 대한 인식도 들어봤다. 방값이 쌀수록 주거 위험은 커졌지만 청년들은 돈이 없어 안전한 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 주거 안전'을 조명한다. [기자말] |
"이대로도 월세 놓으면 돈 50~100만 원씩 들어오는데 몇백 몇천씩 들여서 투자하겠어요? 집주인들이 얼마나 짠돌이 짠순이처럼 안 쓰는데."
공인중개사 이모(50)씨는 원룸 안전 설비 강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안전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원인은 높은 비용과 허술한 법망이다. 스프링클러 설치엔 약 800만 원이 든다. 설치 후엔 물탱크도 채워야 하고, 제어 컴퓨터도 필요하다. 설치비용뿐 아니라 설치 기간 동안 영업을 못 해 발생하는 비용도 있다.
시공전문업체 가온 D&C의 안창길(48)씨는 "스프링클러 달려면 덴조(천장의 일본식 표현) 다 뜯어야 해서 공사할 동안은 세입자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비싼 돈 주고 설치해도 낡은 건물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노후화된 건물에 스프링클러만 설치하는 건 무너진 잇몸에 임플란트만 박아 넣는 꼴"이라고 말했다.
안전에 대한 책임을 등진 집주인들에게 허술한 법은 방패막이가 됐다. 신림역 인근 4층짜리 건물 임대인 A씨는 "건물이 작아서 스프링클러는 설치 안 해도 된다. 안전시설 신경 써본 적 없다"고 말했다. 현행 소방시설법상 스프링클러 설치는 6층 이상 건물에만 의무다. 소화기, 단독경보형 감지기는 전 주택 의무 사항이지만 이마저도 처벌 조항이 없어 강제하기 어렵다. A씨는 "(안전장치들은) 각자 알아서, 적당히 한다"며 자신은 관련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공인중개사도 안전을 책임질 의무는 없었다. 공인중개사법에 따르면 공인중개사는 집을 계약할 때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있는 항목들을 직접 확인하고 세입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주택용 공인중개사 세부 확인 사항에 소방과 관련한 내용은 단독경보형 감지기 설치 여부 하나밖에 없다. 방범용 시설을 따지는 항목은 없었다.
'돈 되는 안전' 안전 강화는 투자라는 인식 전환 필요해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이영주 교수는 "법 강화뿐 아니라 시장에서 안전에 대한 투자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 방법으로 소화설비할인 제도를 언급했다. 이 제도는 소화기, 스프링클러, 옥내외소화전 등 소화설비를 설치한 집주인에게 설비별로 보험 할인율을 적용하는 제도다. 보험연구원 이기형 연구위원은 이 제도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 비용 대비 회수하는 이익을 높여서 집주인들의 안전 투자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화설비할인제도가 있지만 할인 항목이 적고 할인율도 고정돼 있어 집주인들의 소화설비 설치를 유도하기 어렵다. 손해보험사들의 약관에 따르면 할인이 적용되는 설비는 소화기, 자동화재탐지설비 2개에 불과하고 할인율도 각각 3%, 8%로 일정하게 적용된다. 성능이나 종류에 따른 할인율 차등 없이 소화기가 있으면 보험료를 3% 할인받고 없으면 못 받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소화기나 자동화재탐지설비만 있는 집과 스프링클러와 같은 안전 설비를 추가로 설치한 집의 할인율 차이가 없다. 이영주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보험 체계가 탄력성이 없다 보니 투자하는 입장인 집주인들에게 돈을 더 들여 안전 설비를 설치할 동기 부여가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신림동 한 원룸에서 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성 거주자를 뒤쫓아가 집에 침입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이후 서울시 관악구는 지난해 11월 '여성 안심 원룸 인증제'를 도입했다. 안심 원룸 인증제는 집주인이 인증을 신청하면 경찰이 현관문 방범 장치, CCTV 설치 등 52개 항목을 평가해 인증 현판을 주는 제도다.
관악구는 지난해 안심 원룸 1호가 나왔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면서 "민간의 자발적인 시설 개선 효과가 기대된다"며 계속해서 이 사업을 추진할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2월 16일 관악구청에 정보공개를 신청해 받은 내용에 따르면 지금까지 단 한 곳만이 인증을 신청했고 이 한 곳만이 인증을 받았다. 즉 안심 원룸 인증제가 해당 지역 원룸 소유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관악구 관계자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져야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집주인들이 신청할 텐데 지금은 사업성이 크게 없어 동기부여가 안 된다"고 밝혔다. 관악경찰서 관계자는 "지정한 원룸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취지가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제도가 활성화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1호 원룸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부동산 2곳 모두 '안심 원룸 인증제'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관악구 여성 안심 원룸 인증제와 달리 충청남도 공주시가 실시하고 있는 '학생 안심 원룸 인증제'는 성과를 거뒀다.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주경찰서는 대학과 연계해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인증받은 원룸이 알림창으로 뜨도록 했다.
인증제를 고안한 공주경찰서 박재현 경위(48)는 "2014년 12월 대학가 원룸촌에 침입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살펴보니 출입문 도어락 설치가 안 된 건물들이 타깃이 됐다"며 도입 배경을 밝혔다. 침입 사건이 일어나고 원룸촌엔 학생들이 다 빠졌지만, 시설을 보강해 인증받았다고 홍보하니 학생들이 다시 돌아왔다.
인증받은 방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자 집주인들이 먼저 설비 보강에 나섰다. 1년 만에 67개 빌딩이 인증을 받았다. 형사정책연구원 최수형 실장은 "지역사회 수준에서 범죄피해에 취약한 주변 요인을 계속해서 찾아보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며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가 밑바탕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집에서만큼은 맘 놓고 살고 싶다" 청년이 정의하는 '주거 안전권'
우리나라 헌법엔 주거권도, 안전권도 없다. 영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부하 교수는 "헌법에서 규정한 '주거의 자유'는 그 법적 성질이 자유권"이라며 "사생활 침해를 따지는 소극적 해석에 그친다"고 밝혔다. 남서울대학교 부동산학과 임숙녀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주거권도 권리라는 인식이 조금씩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라며 "적극적으로 본다면 안전권이 주거권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취재팀은 설문 조사 말미에 청년 105명에게 주거에 대한 안전권을 어떻게 정의할지 물었다. "의식주의 한 요소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 "내 공간을 지켜줄 수 있는 보호막", "안전 정보를 충분히 받고 자각한 상황에서 집을 선택할 권리" 등의 답변이 나왔다. 답변을 워드 클라우드로 구현해보니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걱정 없이'였다. 그 외에도 '편안', '안심'과 같은 단어가 두드러졌다.
2030세대의 주거권 논의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미흡한 실정이다. 더욱이 청년 주거 안전 문제는 지금까지 조명받지 못했고 그사이 원룸 시장엔 안전 빈부격차가 심화됐다. 주거기본법 3조 5항에 따르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주택이 쾌적하고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주거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청년 주거, 그중에서도 안전을 논할 때다.
[미국 사례] 주택 시장에서 활발하게 적용되는 소화설비할인
미국 손해보험회사들은 설비 유무뿐 아니라 집 특성을 고려한 소화설비할인제도를 운영해 화재 사고 위험을 낮추는 데 일조하고 있다. 취재팀은 미국의 보험 사업 전반에 관한 연구와 보험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 비영리 단체 III(Insurance Information Institute)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 설비할인대상에 주택이 들어가나?
"그렇다. 화재설비할인은 주택보험에 들어가 있다. 미국은 95%가 주택소유자보험(homeowner insurance)에 가입돼 있다. 높은 비율로 설비할인 적용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 보험료율 책정은 어떻게 이뤄지나?
"할인율은 일반적으로 1%~10%다. 설비 유형에 따라 할인율이 달라지는데 설비가 포괄하는 범위가 넓을수록(extensive) 더 많이 할인된다. 화재경보기가 있는지 여부 뿐만 아니라 화재경보기가 소방서와 연결돼 있다면 소방서의 규모와 전문성까지 따져 할인율을 정한다. 이 밖에도 사는 지역, 과거 사고 이력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책정한다."
- 집마다 다른 특성을 어떻게 따지나?
"우선 집주인이 보험회사에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파악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 보험회사에서 직원을 파견해 고객의 집에 방문한다. 방문 결과를 토대로 집에 맞는 할인율을 책정한다. 안전 설비를 설치하는 건 보험료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사고 위험을 낮추기 때문에 집주인에겐 이득이다."
[청년 주거 안전 보고서 1] '안전도 빈부격차' 안전도 돈으로 사야 하나요
[청년 주거 안전 보고서 2] 청년들이 안전한 집을 택할 수 없는 이유 '돈'
[청년 주거 안전 보고서 3] 안전은 뒷전인 원룸 시장… '안전 강화=투자'로 인식해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관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에서 '유전무피 무전유피(有錢無被 無錢有被) 방값이 싸질수록 위험도 커지는 청년 주거안전 빈부격차'라는 제목으로 장려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