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으로 기억한다.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심각했던 그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생각했던 소시민인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검색하다 정신대연구소 '정신대할머니말벗봉사'를 발견했다. 바로 신청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언론에 유명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정신대대책협의회가 몇 년 전 여성인권박물관도 만들면서 바뀐 이름이다.
200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정신대 문제(그 당시 일본군 성노예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를 다룬 단체로는 정의연의 전신 격인 정신대대책협의회와 정신대연구소가 있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정신대대책협의회는 수요집회를 비롯해 언론에 나타나고 투쟁하는 앞에 보이는 단체라면, 정신대연구소는 정신대대책협의회에 속한 부서 중 하나처럼 뒤에서 조용히 활동하는 작은 단체였다.
당시 서울 테크노마트 강변역 근처 회사를 다니던 나는 합정역까지 2호선을 타고 가서 자원봉사자 기초교육을 듣고 할머니와 말벗이 되는 말벗봉사자가 되었다. 말벗봉사자는 할머니와 주기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를 하는 자원봉사활동이다. 지금처럼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국제사회에 언급이 크게 되지도 않았던 때라 당연히 많은 지원과 관심도 없었다.
청소년과 일반인의 자원봉사활동이 인정되는 1365가 존재하던 시절도 아니고 그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여성으로서 몹 쓸 일을 당한 여성에 대한 문제, 정신대 문제에 대한 관심, 할머니와 인간관계를 돌아가실 때까지 맺기 위한 사람들의 단체였다고 할까? 정신대연구소에는 국장님과 간사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월 1~2회 할머니를 찾아뵙기 시작했다.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진행하는 수요집회는 주류 할머니들이 나오신다면, 정신대연구소에서 만나 뵙고 챙기는 할머니들은 대부분 언론을 피하는 비주류 할머니였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오신 할머니 두 분과 파주에 사시는 할머니, 고양시 삼송동에 사시는 할머니, 이렇게 4분을 찾아뵈었다.
중국에서 목사님을 통해 어렵게 귀국하신 할머니들은 수십 년만의 우리나라 문화에 괴리를 느끼시고 중국으로 돌아가셨고, 파주 할머니는 아들이 하나 있으셨는데 미국에 살고 있어(한국전쟁 때 미국 병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미국으로 가신 적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삼송동 황 할머니만 찾아뵙게 되었다.
초기에 7~8명 되던 봉사자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2007년 6월에는 결국 간사 선생님(현재는 제주도에서 사진작가이며 마을 아카이브 단체를 꾸리실 준비를 하고 있다)과 2명의 친구, 즉 나까지 4명만 남게 되었다.
꽃을 좋아하셨던 황 할머니
황 할머니는 꽃을 유난히 좋아하셨고 집 마당에는 늘 꽃들이 많았다. 키가 큰 나를 '키다리'라고 부르셨고, 나와 늘 함께 다녔던 구파발 사는 친구에게는 '구파발'이라고 칭하셨다.
서른이 넘었는데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 할머니나 찾아다닌다며 걱정도 해주시고 된장찌개도 맛있게 끓여주셨다. 할머니 댁 뒤 창고에 누가 버린 물침대가 있었는데 그 침대에 누워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했던 그날의 추억을 어찌 잊겠는가. 할머니는 보통 할머니, 우리들의 친절한 할머니였다.
증언집을 만들고 증거를 내세워야 했던 정신대대책협의회와 목적 자체가 다른 관계로, 우리는 만나면 '그 시절' 이야기는 여쭙지도 않았고 할머니께서도 한 번도 '그 시절'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구파발'과 할머니께 찾아뵙던 어느 봄날, 할머니께서 마당에 핀 꽃을 보시다 갑자기 주저앉아 울던 모습. 아무말 나누지 않았지만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사람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2007년 봄, '구파발'과 할머니를 찾아갔더니 갑자기 아프셔서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울면서 할머니를 찾아뵙고 오던 길에 슈퍼에서 흘러나오던 채림 주연의 <달자의 봄> 드라마까지 생생하다.
할머니는 그해 6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할머니 부고 기사에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13세 때 연행되어 몽고, 싱가폴, 홍콩 등에서 10년간 모진 일을 당하셨다는 것을.
할머니를 7년간 만나 뵈었지만,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발간한 증언집에 할머니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책이 내 방 책상에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읽지 않았었다. 할머니의 자세한 사연을 알기가 두렵고 무서웠다. 아는 사람이 당한 일이라고 믿기 힘들 것 같았다.
떳떳하다 할 수 있을까
할머니를 보내고 나는 다른 할머니를 찾아뵙고 인간관계를 쌓아갈 용기가 없어졌다. 다음 해에 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등 개인사정도 있었지만 정신대, 위안부, 성노예 문제는 나의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소중하게 지낸 한 사람과의 추억과 관계를 떠올리기에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기에는 두렵고 겁이 났다. 한마디로 나는 비겁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쉬운 기부금을 내는 것이었다. 중간에 정대협이 정의연으로 이름이 바뀌고 여성인권박물관도 생기고 내가 낸 돈들이 잘 쓰일 것이다, 할머니를 위해 내가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 스스로 면죄부로 삼고 혼자 위안했다.
몇 달 전 제주도에 사는 정신대연구소 (그때의) 간사 선생님께서 여성인권박물관에 황 할머니 사진과 이력이 있다고 가슴이 먹먹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아, 잊고 살았던 할머니. 우리들의 할머니. 서른 넘어 결혼 못 한다고 늘 걱정해주시던 할머니.
동네 어린아이들만 보면 환한 미소 짓던 할머니. 내 아이를 보셨으면 참 좋으셨을 텐데. '구파발'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데. 그때 대학생이던 막내였던 친구는 이제 어엿한 학교 선생님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데. 그때 간사 선생님은 중간에 사진작가로 변신하시고 사람들을 삶을 가슴으로 찍는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덧 시간은 이렇게 흐르고 할머니들을 한두 분씩 떠나시고 계신데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일련의 기사들은 정신대연구소 말벗 봉사자로서, 아무도 관심 없던 시절 고군분투했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결같이 일제강점기 여성의 인권, 전쟁에서의 성폭력을 위해 노력한 시민단체의 행보까지도 퇴색시키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30년간 이 문제에 아무 관심 없었던 사람들이 모든 해명을 듣기도 전에 비난하고 몰아세울 자격이 있을까? 지난 세월 기부금으로 대충 생각 안 하고 넘기려 했던 나 또한 떳떳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살아계신 피해자 할머니들임은 분명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