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런던, 브리스톨, 풀(Poole)과 같은 도시만이 아니라, 뉴질랜드의 해밀턴(Hamilton), 미국 버지니아주의 리치몬드(Richmond), 벨기에의 안트워프(Antwerp)와 같은 도시에서 모두 동상 철거 바람이 불고 있다. 대부분 인종차별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현상이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은 인종을 포함한 모든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이른바 식민지 시절에 관한 역사적 기념물들을 제거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사실 세계 여러 나라에는 다양한 동상과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어떤 것은 관광지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고 그곳에 오래 서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인종차별 시위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동상들은 뜨거운 논쟁거리로 급부상하고 있다.
뜨거운 논쟁거리로 급부상한 동상 철거
얼마 전에 시위 군중들에 의해 무너진 영국의 노예상 콜스톤(Edward Colston)의 동상만이 아니라,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리 장군(Robert Edeard Lee, 1807-1870)이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국왕(Leopold II, 1835-1909)과 같은 유명한 인물의 동상도 반인종차별 시위대에게는 눈엣가시가 되고 있다.
리 장군은 노예가 30명이나 있는 집안에서 자랐고 200여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3개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이미 그 자신이 추가로 노예를 살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너무나 잘 적응하여 살았었다. 184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리 장군 개인 소유의 노예도 22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가 비록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는 설이 있지만,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의 부당성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것 때문에라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리 장군의 먼 친척의 후손인 리 목사(Robert W. Lee)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리치몬드(Richmond)에 있는 리 장군의 동상은 이제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 되어 버렸기에 철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리 장군의 인종차별에 관한 인식은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국왕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가 1885년부터 1908년까지 23년 동안 아프리카의 콩고를 철권으로 통치하는 동안 약 1000만에서 15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무 농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는 당시 콩고 전체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숫자이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가혹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5살짜리 한 여자 아이는 고무 수액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고 해서 손과 발이 잘리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산 채로 말이다.
국제적 비판과 압력으로 벨기에 의회가 그를 콩고자유국가(Congo Free State)의 군주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기 전까지 레오폴드 2세의 그러한 만행은 무려 2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1909년 사망할 때까지 당당하게 벨기에의 국왕으로 군림했다. 이렇게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일은 여전히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1960년까지 51년 동안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로 더 고통을 당했다. 1960년 콩고가 독립하자 그의 동상이 철거되었지만, 2005년 당시 콩고 문화부장관이었던 무충가(Christophe Muzunga)는 레오폴드 2세 국왕의 동상을 다시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그가 콩고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기에 그의 공과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동상은 세워진 지 6시간 만에 공식적으로 철거되었다.
그런데 벨기에에는 여전히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번 반인종차별 시위의 확산 분위기 속에 2020년 6월 9일 앤트워프에 있던 그의 동상이 처음으로 철거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가운데 많은 동상들도 시위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여전히 받고 있다.
영국 존슨 총리 "동상 철거, 우리 역사에 대해 거짓말 하자는 것"
지난 토요일 런던 중심가에 있는 의회 광장(Parliment Square)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영국의 악명 높은 훌리건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극우세력과 참전용사들도 오전부터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영국의 자랑스러운 기념물들을 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런던시는 미리 윈스턴 처칠의 동상에 보호조치를 취했다. 1주일 전에 반인종차별 시위가 벌어지던 가운데 누군가가 스프레이로 그 동상의 받침대에 처칠의 이름에 가로로 길게 금을 긋고는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was a racist)"라고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시위대는 그 동상의 보호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경찰을 향해 병과 폭음탄을 던지면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영국!", "영국!" 아마 마음 속으로는 "영국 만세!"를 외치고 싶었으리라.
이들은 우연히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서로 연락을 취하여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들이 이런 시위를 기획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이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공격을 받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독일 슈피겔지(Spiegel) 보도에 따르면, 이 시위에 참가한 훌리건 가운데 58세의 션(Sean)이라는 사람은 얼마 전에만 해도 노예상이었던 에드워드 콜스톤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브리스톨에서 그의 동상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런던의 다른 동상들도 그 지경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분기탱천했다는 것이다.
그는 "노예제도에 관심 없고 전쟁 기념물을 보호하고 싶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특히 흥분하게 된 이유는 지난주 시위가 있었을 때 시위대 한 명이 전쟁기념탑 위에 있던 영국기를 불태우려 한 장면 때문이었다. 사실 션과 그의 친구들은 인종차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도 노동자 계급으로 공공임대주택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다. 사회적 차별이라면 그들도 충분히 받고 자란 것이다. 그런데 충돌을 우려한 런던시의 조치로 당초 토요일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반인종차별주의 시위가 금요일로 앞당겨진 것을 토요일에 모인 션과 같은 극우주의자들은 그들의 '승리'의 징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승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재 영국 정부에서는 과거 인종차별주의와 관련된 인사들의 동상이나 기념물을 계속 공중에 전시할지 여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는 뉴스도 들린다. 특히 런던 시장인 사디크 칸(Sadiq Aman Khan)은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논의를 위하여 '공공장소 다양성 위원회(The Commission for Diversity in the Public Realm)'를 수립하였다고 밝혔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 런던에서 태어난 칸의 부모는 1968년 파키스탄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이주민이다. 그는 영국의 인종적 관용의 상징적 인물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처럼 인종차별과 관련된 기념물의 철거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정치가들도 여전히 많다. 특히 영국의 존슨 총리(Boris Johnson)는 처질의 동상이 '훼손'되었다는 소식에 격노하며 자신의 트위터에 처칠이 자신의 영웅이며 "영국을 그리고 전 유럽을 파시스트와 인종차별주의자의 폭정에서 구해내었다"고 썼다. 그리고 처칠이 "과거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부적절한 의견을 가끔 표명하였지만" 역사를 함부로 바꾸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도시와 마을에 세워진 동상은 이전 세대가 세운 것이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우리와는) 다른 시각과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상들은 우리에게 과거를 가르쳐 준다. 그 모든 실책과 더불어서 말이다. 그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교육을 빈곤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처칠의 전기도 쓴 바 있는 존슨은 과연 처칠의 아시아인에 대한 확고한 인종차별적 태도를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처칠은 자신의 입으로 호주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했던 인물이다.
"나는 강한 인종, 높은 수준의 인종, 세상의 지혜가 더 높은 인종이 와서 그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해서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처칠이 파시즘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해도 그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적 언행에 대한 비판이 그 공에 묻혀서는 안 될 일이다. '인류에 대한 범죄'와 관련된 과거 청산은 여기 지금을 살아가는 현 세대에게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더 나은 인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도 특히 제국주의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의 역사와 관련된 과거 청산과 관련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과연 플로이드의 죽음에서 촉발된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