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불법 사찰 파일도 갖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의문이다. 이명박 정권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불법 사찰을 당한 봉은사 전 주지 명진 스님이 지난 15일 국가와 조계종 종단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야만의 기록이 폐기처분되지 않고 아직도 어두운 창고에 고이 모셔져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이명박 국정원'이 불법 사찰한 인사는 명진 스님만이 아니었다. 권양숙 여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정연주 전 KBS 사장 등 유력인사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 반대 학자들도 전방위적으로 사찰했다.
심지어 당시 여당 의원 가운데 '친이(친이명박)'계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이방호 전 의원과 황영철 전 의원 등도 미행, 감시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당시 국정원 사찰 대상에 문재인 대통령도 포함됐을 수 있다는 게 합리적 의심이다.
불법사찰 기록 존치하면 사람 잡는 흉기로 악용
지난 2017년 6월 '국정원개혁위원회 적폐청산팀(T/F)'이 출범했지만, 이내 활동을 마쳤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작업이 제대로 진행됐다면 국정원은 불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정권의 수족 노릇을 했던 과거와 달라야 했다.
하지만 이날 명진 스님과 함께 기자회견을 한 '명진스님 제적 철회를 위한 원로모임' 등은 기자회견문의 첫 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오늘 명진 스님이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 이명박 대통령 시절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공작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가와 조계종을 상대로 제기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계기로 국정원 개혁을 위한 작은 발걸음을 시작한다."
이들이 불철저한 개혁의 징표로 내세운 건 국정원이 아직도 국가기관이 동원된 불법의 기록을 공개하지도, 폐기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권에 부담되는 인사를 매장하려고 조작한 허위 기록도 있고, 미행을 통해 획득한 불법 정보도 있다. 이게 존치된다면 언젠가는 창고에서 튀어나와 이명박 정권 때처럼 사람 잡는 흉기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국정원'은 환골탈태했을까? 명진 스님이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기까지의 지난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국정원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배포된 경과보고를 재구성해 봤다.
[1차 시도] 국정원 "국가안전보장과 관련한 정보"... 사찰 기록 공개 못해
2017년 8월 조계종단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한 명진 스님은 자승적폐청산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명진 스님은 단식 중에도 이명박 정권 때의 국정원이 자신을 불법 사찰했고, 봉은사 주지직 박탈에도 개입했다고 주장하면서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아래 국정원 개혁위)에 조사도 요구했다.
명진 스님은 그해 10월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주도한 '내놔라내파일 시민행동'의 국정원 정보공개청구 운동 기자회견에 참석해서 사찰 자료 공개를 거듭 촉구했다.
국정원 개혁위는 그해 11월 "원세훈 전 원장의 명진 스님에 대한 비위 수집·심리전 전개 지시 등 행위는 직권 남용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검찰에 수사의뢰하도록 권고했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및 명진 스님의 봉은사 주지 퇴진 과정에서 국정원이 영향력을 행사한 증거나 정황은 확인하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명진 스님에 대한 불법 사찰은 확인했는데, 조계종단으로부터 퇴출된 것은 국정원과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다. 석연치 않은 발표였다. 이에 명진 스님은 '내놔라내파일 시민행동'과 함께 국정원 파일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국정원은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의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한 정보에 대해서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보공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국정원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미행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해서 수집한 기록을 사실상 국가안전보장과 관련한 합법적인 정보로 판단한 셈이다.
국정원 개혁위도 명진 스님 퇴출 과정에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지만, 11월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10년 7월 회의석상에서 한 다음과 같은 발언 내용을 공개했다.
"범민련 고문을 하던 종북좌파 세력 명진이 서울 한복판에서 요설을 설파하도록 두느냐. 이런 사람을 아웃시키지 못하면 국정원의 직무유기이다."
명진 스님을 봉은사 주지직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국가 권력기관인 국정원의 직무라는 '요설'을 설파한 셈이다. 명진 스님은 12월 국정원의 정보공개 거부에 대한 이의신청했지만, 국정원은 다음해인 2018년 1월에 국가안보를 이유로 다시 비공개 처분을 내렸다.
[2차 시도] 영포빌딩 지하창고서 발견된 문건 "명진의 막가파식 행태..."
국정원은 거듭 정보공개를 거부했지만, 명진 스님의 불법 사찰 증거가 영포빌딩 지하창고에서도 발견됐다. 2018년 3월 검찰이 대통령 기록물 유출 사건으로 영포빌딩을 압수수색했을 때였다. 3400여건의 청와대 유출 문건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제목의 사찰 문건도 포함돼 있었다.
"명진(스님)의 막가파식 행태에 전략적 대응방안 강구"
이 문건은 이명박 청와대 민정수석실·국가정보원·경찰청 등이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불법사찰 문건의 하나였다.
그해 5월 김석규 전 국정원 방첩국장은 명진 스님을 사찰한 행위 등에 대해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6월에는 명진 스님 등을 사찰한 혐의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기소됐다.
당시 검찰에 따르면 원 전 원장 시절 국정원은 명진 스님 등을 종북좌파 세력으로 분류해서 국정원 방첩국 내에 일명 '특명팀'을 별도로 조직해 무차별적인 사찰을 벌였다. 8월 1심 법원은 김석규 방첩국장에 대해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2019년 4월 명진 스님 등은 국정원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정보비공개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9월에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30건의 사찰 문건 중 13개 문건에 대해서만 공개를 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3차 시도]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 기관도 기망"... 개혁 작업 촉구
12월에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13건의 '명진 스님 X파일'은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MB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종교계, 언론계, 단체까지 동원해 명진 스님을 매장하려고 했던 광기에 찬 국가 폭력의 기록이었다. (관련 기사:
국정원 개혁위의 비개혁적 결론, 대통령은 알까 http://omn.kr/1ml6u)
가령 2010년 7월 13일에 작성된 '종북좌파세력 연계 불법 활동 명진승 내사계획'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별 추진계획이 적시돼 있었다.
"[1단계] 상세 신원 확인 및 기초자료 입수 분석 O속가 가족 및 친인척 신원사항 확인, 월북자 등 신원 특이자 적출 O출가 전후 행적과 종단과의 관계 및 봉은사 주지 임명 내막 확인
[2단계] 대상자 주변인물 협조자 포섭 및 집중 미감('미행감시'의 약어) 실시 O봉은사 내부사정에 정통한 신도(OOO, OO세)를 협조자로 포섭, 해외 연계 종북좌파세력에 자금 제공 여부 파악 주력 O대상자 집중 미감을 실시, 종북좌파세력 등 접촉인물 확인"
국정원은 위의 문건에 대해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의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한 정보"라면서 비공개 처분을 내렸지만, 민간인을 미행감시하고 사찰 내부에서 협조자까지 포섭해 공작을 벌인 불법 정보였다.
3단계는
삭제된 채 공개됐는데, 일부 언론 보도에 다르면 '대상자 이메일을 확보하여 과학방첩활동을 병행하고 불법 활동 범증을 확보하여 의법 처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메일까지 확보하면서 전방위적으로 그물을 쳤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불법 사찰 과정에서 조계종단과 긴밀하게 협의한 흔적도 있다.
"조계종 종단 내부적으로 연임을 반드시 저지하도록 간접적인 압박 스탠스 유지" (2010년 1월 7일에 작성한 '명진 봉은사 주지 최근 특이 동향 및 평가' 문건)
"종단 차원의 주지직 퇴출 유도와 함께 면밀한 동향 점검 및 보수언론을 통한 부조리 실태 부각 등 입체적인 압박 전개가 바람직... OO에게 직영 사찰 조기 집행은 물론 종회 의결 사항에 대한 항명을 들어 호법부를 통한 승적박탈 등 징계절차에 착수토록 주지" (2010년 3월 31일 작성한 '명진 봉은사 주지 관련 각종 추문 확인 결과 및 평가' 문건)
13개 문건은 빙산의 일각... 국정원은 청와대도 속였나?
명진 스님 측은 이것도 빙산의 일각으로 보고 있다. 행정소송을 통해서도 공개되지 못한 17건의 문건 이외에도 국정원은 미행감시 결과 보고와 청와대 보고 문건 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국정원 개혁위가 퇴출 개입 흔적을 찾지 못했던 것은 국정원이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게 명진 스님 측의 주장이다. 명진 스님이 기자회견에서 국정원 개혁 조치를 촉구하며 문재인 대통령 면담과 청와대 1인 시위도 나서겠다고 밝힌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국정원 개혁위뿐만 아니라 청와대도 속았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건이 공개된 뒤 지난 2월 <오마이뉴스>를 필두로 일부 언론들이 국정원 행태를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했고, 민변·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감시네트워크 등도 "국정원 개혁이 현 정부의 공약"이라며 "21대 국회에서 신속하게 국정원 개혁을 해야 한다"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4개월이 지나도록 청와대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에 명진 스님과 함께 기자회견을 한 인사들은 "명진 스님이 소송을 통해 확보한 불법사찰 내용 13건도 명진 스님에 대한 전체 사찰 문건 중 극히 일부일 뿐이며,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불법사찰이 자행됐는지 전모를 알 길이 없다"면서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 국정원개혁위원회에게도 불법사찰 실태와 자료를 감추며 기망하기에 급급했다"라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명진 스님, 대한민국에 10억원 손해배상소송..."대통령 면담요청" http://omn.kr/1nxko)
'이명박 국정원'은 아직 살아 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평화의 길(이사장 명진) 유병문 사무처장은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명박 국정원 시절에 명진 스님을 불법사찰하고 퇴출공작을 펼친 범죄자들은 아직도 처벌받지 않고 국정원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퇴출공작이 없었다고 국정원 개혁위에 보고한 것은 개혁에 대한 저항이자,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명박 국정원'은 문재인 대통령을 사찰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국정원은 아직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불법 사찰 파일을 갖고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국정원에 지시한다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명진 스님 X파일과 흡사한 문건이 존재한다면, 훗날 또 다시 살아날지도 모를 정치공작의 불법 기록을 국정원에 남겨둘 가치가 있을까?
현 정부가 집권 초기에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이명박 국정원'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게 손배소송을 통해 명진 스님이 던진 화두이다. 지금 다시 개혁의 불씨를 지펴서 '이명박 국정원'과 같은 괴물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는 죽비소리이기도 하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것도 국정원과 검찰 등 아직도 끝나지 않은 권력기관 개혁 작업을 완성하라는 유권자들의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