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저녁 7시 30분에 구미시 진미동 동락공원에서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1927)의 주역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의사의 9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에서 연 이 추모제는 탄신 120주년 추모식 및 동상 제막식(2015)과 매년 3·1절의 약식 추념식을 빼면 순국일 전야에 치러지는 추모제는 처음이다.
그는 죽어서도 재소자 1천여 명의 '독립만세'를 불러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로 대구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의 사형선고를 받은 뒤, 고등법원 상고가 기각되어 장진홍의 사형이 확정된 것은 1930년 7월 21일이었다. 8월 1일, 예정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일제는 저들의 식민 통치에 무모하게 도전한 청년을 단죄함으로써 식민지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형 집행을 앞둔 7월 30일 밤 11시, 치안 유지법 위반과 살인 미수, 살인 예비로 사형수가 된 광복단 단원 장진홍은 대구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의 형 집행을 무산시켰다. 향년 35세. 서른다섯 해를 오직 광복의 일념으로 살았던 청년 장진홍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당황한 형무소 측은 서둘러 사인이 뇌내출혈이라고 발표하였지만, 그의 유해가 옥문을 나서자, 수감자 1천여 명이 '조선독립 만세', '장진홍 만세'를 외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는 친족이나 동지들조차 입회하지 못한 채 칠곡군 석적읍 남율리의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묻혔다.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는 1945년까지 15년간 그의 유택을 지나가는 이들은 모두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옷깃을 여며 예를 올렸다던가.
장진홍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은 의열단 결성(1919) 이래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1920),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1923), 나석주의 동척·조선식산은행 투탄(1926) 등의 의거와 임시정부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1932)를 이어준 의열투쟁이었다.
의열투쟁은 "가장 강도 높고 일제에 가한 타격이 가장 컸으며 민중의 지지와 호응도 만세 시위 못지않게 가장 많이 받았던 대일항쟁 방식"(김영범·대구대, 아래 같음)이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효과는 극대화'하고자 한 이 투쟁은 "식민지 지배의 정치적·군사적·사회적·산업 경제적 기반에 두루 타격을 가하"면서 "안으로는 민족 성원들의 항일·반제의 투지와 독립 의지를 크게 고취하"는 것이었다.
장진홍이 의열투쟁으로 눈을 돌린 것은 비밀 항일결사인 광복단에 가입(1916)하여 활동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와 계몽운동가, 영남 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의 인물들로 구성된 광복단은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을 4대 강령으로 한 무력 항일투쟁을 벌인 조직이었다.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현재 구미시 인동동) 옥계동 문림마을 출신으로 1914년 조선 왕실의 근위부대인 조선보병대에 들어가 근무했던 장진홍은 일제 치하 군대의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제대하였다. 일경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 광복단 활동도 어려워지자 1918년 만주로 간 장진홍은 연해주 하바롭스크로 건너가 한인 청장년 80여 명을 규합하여 여러 달 동안 군사훈련을 시행하였다.
한국 청년들을 정예화된 독립군으로 양성하여 일제와 무력항전을 전개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 일대에선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이 깊어지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활동이 곤란해져 그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건 의열투쟁은 그의 실존적 선택이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온 나라에서 펼쳐졌고,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장진홍은 서적 행상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면서 일제가 자행한 학살, 방화, 고문 등 만행을 조사했다. 1919년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그는 함대에 근무하는 경북 출신 승무원 부사관 김상철에게 조사서를 전달하고 그 내용을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927년 4월, 경북 경산에서 매약 행상(賣藥行商)을 하며 때를 기다리던 장진홍은 광복단의 동지 이내성(1990 애국장)의 소개로 일본인 아나키스트 호리키리 시게사부로(掘切茂三郞)를 만났다. 호리키리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폭탄 전문가였다. 마땅한 투쟁의 방법을 모색하던 장진홍에게 이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것이었다.
대한민국 노인동맹단 강우규의 총독 사이토 저격(1919)부터 의열단 단원들의 연이은 의열투쟁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를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강우규는 처형되었고, 부산경찰서 투탄(1920)의 박재혁은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단식으로 자결했으며, 김상옥과 나석주는 각각 의거 현장에서 목숨을 끊었다. 성패를 떠나 의열투쟁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 수 있음을 알았던 그에게 그것은 실존적 선택이었다.
일제의 관공서, 은행 등 공공기관을 폭파하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면서 조선인에게 투쟁 의지를 환기하고자 한 장진홍은 그에게 폭탄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음 달, 호리키리는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을 보여주며 폭약을 함석 관에 넣고 주위에 다수의 철편을 채워야 한다는 등 폭탄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장진홍은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 등 폭탄 재료를 매입했다. 그는 폭탄을 만들어 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 법원, 형무소, 동양척식회사 대구지점, 지서, 대구 부호의 집 등 9개소를 대상으로 거사할 작정이었다. 직접 제조한 폭탄 2개를 인근 산중 협곡에 가서 시험하여 그 성능과 위력을 확인하는 등 그는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10월 16일, 장진홍은 칠곡군 인동면 자택에서 노구솥과 가래 등을 부수어 파편으로 만들고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 등을 사용하여 불을 붙이면 20~30분 뒤 폭발하는 폭탄 6개를 만들었다. 다음 날 자살용 소탄 1개와 거사용 대탄 4개는 지니고 집을 나선 그는 대구로 가서 친지 집에서 묵었다.
이튿날 오전 9시께, 장진홍은 신문지와 삼끈, 폭탄 4개를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덕흥여관으로 갔다. 11시 30분께 그는 신문지로 포장한 4개의 폭탄 꾸러미를 벌꿀 선물이라며 사환 박노선에게 건네어,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부의 순서로 급히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20분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배달된 벌꿀 선물 상자가 터졌다. 폭발은 현장의 은행원과 경찰관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은행의 창문 70여 개가 모두 부서지면서 유리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으며, 은행 주변의 전깃줄이 모두 끊어질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대구 한복판에서 울린 폭발음은 민족의 얼도 깨웠다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대낮에, 그것도 일제가 한국과 대륙경제 수탈을 위하여 세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일어난 이 폭발 사건은 대구 시내를 뒤흔들었다. 폭발로 빚어진 혼란과 함께 도시를 깨운 엄청난 굉음은 식민 통치에 길들고 있던 조선인들의 민족적 정체성도 일깨우는 것이었다.
허를 찔린 일경이 비상 근무령을 내리고 범인 체포에 나섰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일경은 1928년 1월, 성주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정기(1995 애족장) 외 8명을 붙잡아 고문하여 진범으로 꾸며 기소하였다. 이때 시인 이육사(1990 애국장)를 비롯한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도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사실상 이들은 폭파사건과 무관한 이들이었다.
조선은행 폭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장진홍은 1928년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일본 오사카에 사는 동생 의환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929년 2월, 은신처가 드러나면서 그는 조선에서 급파한 일경에게 전격 체포됐다.
2월 19일 대구에 압송된 장진홍은 일경의 심문을 받으면서 의거 사실을 선선히 인정했다. 그는 "이번 거사는 야만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의 폭탄을 던진 것인데 성공하지 못하고 너희들의 손에 붙들린 것이 천추의 유한이다"라고 말했다.
자결로 동갑내기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길을 뒤따르다
또, 그는 조선인 경관에게 "한국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광복 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라고 꾸짖었다. 그는 '단독 거사'를 주장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장진홍은 자신이 사형선고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그는 소리 높여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4월 24일 대구 복심법원에서도 역시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린 뒤, 품 안에서 주먹만 한 돌을 꺼내 재판장에게 던졌다. 그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의자를 집어 던지려다 제지당하기도 했다.
"너희들 일본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놈들의 손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겠다."
장진홍이 옥중에서 작성해 간수에게 보내주기를 요구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보내는 서한의 일부다. 그가 자기 목숨을 일제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거두어들인 것은 밤 11시쯤이었다. 그는 1921년 5월, 같은 대구형무소에서 자결한 박재혁(1895~1921, 1962 독립장) 의사의 뒤를 따른 것이다.
의열단 단원으로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를 폭사시킨 박재혁은 장진홍과 동갑내기였다. 그러나 박재혁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장진홍보다 훨씬 어린 스물여섯이었다. 그것은 청춘을 누리는 대신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던 식민지 청년들의 가슴 아픈 초상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진홍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로부터 35년 뒤, 장진홍 의사 동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구미시의 후원을 받아 구미시 옥계동 3·1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웠는데, 현재 이 동상은 진미동의 동락공원으로 옮겨졌다.
세월을 탓한다면, 역사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동상이 서 있어도 시민들은 장진홍을 잘 모른다. 금오산 어귀의 박희광 선생 동상을 박정희라고 여기는 것처럼 시민들은 무심히 공원을 오갈 뿐이다. 구미시에서 선생의 생가터 인근에 시립 양포도서관을 신설하면서 명칭에 관한 간이 설문조사를 벌였지만, 그의 이름을 딴 '장진홍 도서관'은 '양포도서관'에 밀려 선택되지 못했다.
시민들이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을 꺼려서 그리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장진홍이란 이름과 그의 삶과 죽음의 의미가 낯설었을 뿐이다. 그러나 '장진홍 도서관'이 되었다면 거기서 책을 읽고 공부한 아이들은 '장진홍' 이름 석 자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의 삶과 얼과 따르려 하지 않았을까. 모름지기 '기림'이란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마음에 새기는 일인 것을, 구미시의 어정쩡한 시도를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의 애국 동산에는 '순국 의사 장진홍 선생 기념비'가 낙동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당시 선생의 출신지가 칠곡군 인동면이어서 군청 소재지인 왜관읍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비를 세운 때는 놀랍게도 1953년 7월 31일이다. 휴전협정 체결(7. 27.) 며칠 후, 전쟁이 끝나자마자 순국 의사의 빗돌을 세운 것이다.
시군 통합으로 칠곡군 인동면이 구미시에 편입되어 인동동이 된 때가 1995년이다. 그리고 구미시에서 옥계동 3·1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운 해는 2001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장진홍은 구미에서 낯선 이름이다.
2015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온 선생의 동상 앞에서 90주기 추모제를 열면서도 뒷사람은 부끄럽다. 그게 빼앗긴 조국에 목숨을 바친 의사를 기억하는 우리 시대의 방식이라면, 90년 전의 까마득한 옛일이라서 그렇다면 도대체 역사는 무엇을 기록하는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