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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선생묘
성호 이익선생묘 ⓒ 이장연
 
혼례를 치룬 후 정약용은 아명인 귀촌 대신 약용이란 관명(冠名)으로 바뀌고, 곧이어 미용(美庸)ㆍ용보(庸甫)라는 자를 사용하였다. 뒷날 열수(洌水)ㆍ열초(洌樵)ㆍ죽옹(竹翁)ㆍ탁옹(籜翁)ㆍ균옹(筠翁) 등의 아호도 썼다.

그동안 살던 서울 창동의 셋집에서 회현방에 집을 사서 이사하였다. 부모가 마련해주었다. 9월에 큰아들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2년 전 7월에 첫 딸을 낳았으나 5일 만에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정약용은 아버지와 함께 충주ㆍ진천ㆍ아산에 묻힌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참배하고, 귀로에 학문의 큰 스승으로 사숙해온 성호 이익의 옛집을 찾고, 묘소에 들러 참배하였다. 그동안 성호의 문집을 읽었고, 지금 가까이 하고 있는 학인의 대부분이 그의 제자이거나 '성호학파'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성호 선생에 대한 존중과 경외의 정신이 남달랐다.

「성호 선생의 옛집을 지나며」란 시를 지었다.

 도맥(道脈)이 뒤늦게 우리나라에서 시작되니
 설총이 맨 먼저 그 길을 열었다
 면면이 이어져 포은, 목은에 이르러서
 충의의 정신까지 부족함 없이 발휘했네
 퇴계 나오셔 주자의 오묘함까지 펴 보이고
 천 년 만에 그 도통 크게 이었네
 육경에도 다른 해석 없게 되자
 모두가 다 함께 어진 이로 받들었다네
 맑은 기운이 모두 동관(潼關)으로 모여들어
 활짝 핀 문운(文運)이 섬천(剡川)에 빛났네
 지향하는 뜻 공맹(孔孟)에 가까웠고
 주내고 해석함은 마음ㆍ정현 이었어라
 어리석고 가리운 것들 한가닥 활짝 벗겨
 깊이 잠긴 자물쇠를 열어젖혔네
 어리석은 우리네 지극한 뜻 헤아리지 못하나
 미묘하고 깊게 도체(道體)는 움직인다네.
 
성호 이익 성호 이익은 안산에 평생을 머물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익의 집안인 여주이씨 가문은 한양 소정동에 ‘이씨 집안 서재’라고 알려진 유명한 서재가 있었는데요, 이곳에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아 성호 이익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고, 형인 옥동 이서는 이 서재에서 본 중국 왕휘지의 책을 통해 서예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동국진체라는 서예법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이 서재는 후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이가환을 낳았고, 그의 제자인 정약용도 이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외의 학문을 접하기도 합니다
성호 이익성호 이익은 안산에 평생을 머물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익의 집안인 여주이씨 가문은 한양 소정동에 ‘이씨 집안 서재’라고 알려진 유명한 서재가 있었는데요, 이곳에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아 성호 이익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고, 형인 옥동 이서는 이 서재에서 본 중국 왕휘지의 책을 통해 서예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동국진체라는 서예법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이 서재는 후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이가환을 낳았고, 그의 제자인 정약용도 이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외의 학문을 접하기도 합니다 ⓒ 성호기념관
 
정약용이 성호를 사숙한 것은 개인사를 훨씬 뛰어넘는 '역사'가 된다. 조선경학사, 조선실학사의 거대한 산맥이 성호에서 다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찬묘지명」에서 성호를 사숙하게 된 배경을 밝힌다.

"15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선고(先考, 아버지)가 다시 벼슬하여 호조좌랑이 되어 서울에 우거하였다. 이때 이가환이 문학으로 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자부 이승훈이 또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모두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조술하였다. 용(정약용)이 성호의 유저를 보고는 흔연히 학문하기로 마음 먹었다."

정약용이 성호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범한 관리이거나 유능한 재상으로 종신하였을지 모른다. 성호를 통해 실학사상의 진수를 배우고, 스승을 뛰어넘는 실천적인 경세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뒷날 스승을 회고하여 "성호의 유집이 거의 100권이나 된다.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다" (『여유당전서』 시문집 중「답중씨손암서(答仲氏巽菴書)」)

성호는 나라의 정치가 잘되지 아니하고 사회가 어지러운 이유를 '여섯 가지의 좀(蠹)'이 있기 때문이라 들고, '6좀'의 해독이 도적보다 더 크다고 지적했다. 이 역시 정약용의 사회개혁사상으로 이어진다.

첫째는 노비이니, 노비제도가 있으므로 상전이란 자들이 호의호식하고 남의 노력을 탈취할 뿐이며,

둘째는 과거이니, 과거는 아무 쓸데 없는 문사(文詞)에 사람의 정력을 허비케 하고 다행히 급제된 사람들도 한낱 벼슬의 권리를 악용하여 인민의 고혈을 짜먹게 하며,

셋째는 문벌이니, 문벌은 양반이란 명목 밑에서 노동을 싫어하고 농업을 천시하고 무재무능하면서도 인민을 내려다보며,

넷째는 기교, 즉 실용성이 없는 사치품만을 좋아하고 요술과 미신으로써 인민을 미혹시키는 동시에 인민의 재산을 낭비하며,

다섯째는 승려이니, 승려는 불교를 신앙하기보다는 노동과 병역을 도피하고 유식(遊食)의 무리로 전화하며,

여섯째는 나타(懶惰)이니, 나타는 근로를 천시하고 남의 등골을 빼먹기만 힘쓰다가 나중에는 사기와 절도를 일삼게 된다. (주석 5)


주석
5>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110쪽, 청년사, 198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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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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