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9월 4일 슈바이처가 세상을 떠났다. 출생 때(1875년) 독일인이었던 슈바이처는 사망 때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의사이자 목사였고, 음악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슈바이처보다 네 살 아래로 동시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그를 가리켜 "우리들의 슬픈 시대에 한 사람의 위인이 살
고 있다"(출처 : 다음 백과,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알베르트 슈바이처)고 했다.
슈바이처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상은 그가 나이 38세이던 1913년부터 40년 이상 실천한 오랜 봉사 활동에 대한 세계적 보답이었는데, 노벨상 위원회가 밝힌 수상 이유를 요약하면 "인류의 형제애(兄弟愛)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출처 : 다음 백과,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것이었다.
여기서 형제애를 발전시켰다는 말은 슈바이처가 종족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존귀하다는 사상을 지구 구석구석에 전파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봉사했다는 뜻이다.
슈바이처는 인류 역사가 인정하는 봉사자인데 어째서 38세나 되어서야 봉사의 길로 들어섰을까? 그는 본래 철학박사이자 신학박사로서 24세부터 목사로, 또 신학대학의 강사로 살았다. 그 이전인 18세 이래 오르간 연주자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38세나 되어 봉사의 길로 들어선 슈바이처
그는 30세이던 1905년 가을에 파리에서 아프리카 콩고 지방의 참담한 실상을 알리는 선교사 협회 홍보물을 보았다. 어릴 때부터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고,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과 어울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해온 슈바이처였다.
그 홍보물을 보는 순간 슈바이처는 의료 봉사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30세이던 슈바이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의과대학에 진학해 1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37세인 1912년에 의사 자격을 얻었고, 이듬해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는 간호사 훈련을 받았다.
부부는 1913년 3월 적도 아래 프랑스 식민지 가봉의 랑바레네에 도착했다. 닭 사육장을 수리한 공간이 슈바이처 부부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는 이질, 말라리아, 폐렴, 나병, 폐결핵, 정신병, 파상풍 등을 치료하는 병원 구실을 했다.
슈바이처가 병원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잠시 유럽으로 돌아와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어머니는 프랑스 군마(軍馬)에 깔려 사망했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전쟁이 끝났을 때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었다. 프랑스 식민지인 가봉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데에는 독일 사람인 것보다 프랑스 사람인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이후에도 슈바이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일했지만, 그래도 세계 각지에서 달려와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 성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함께 환자를 보살피는 의사와 간호사들 덕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슈바이처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가봉 정부는 슈바이처의 병원을 '슈바이처 평화 기념 병원'으로 계속 가꾸어 가고 있다.
"내가 있을 곳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오"
마지막으로, 슈바이처의 널리 알려진 일화 한 가지를 재론할까 한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갈 때의 일이다. 슈바이처가 타고 있는 기차에 기자들이 몰려왔다. 기자들은 우르르 특등실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슈바이처가 보이지 않았다.
기자들은 다시 1등실로 들이닥쳤다. 그곳에도 슈바이처는 없었다. 2등실에도 없었다. 다른 기자들이 슈바이처 인터뷰를 포기했을 때 부지런한 기자 한 명이 3등실에서 슈바이처를 찾아냈다. 슈바이처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을 진찰하고 있었다. 기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3등칸에 타고 가십니까?"
슈바이처가 대답했다.
"상급 객실의 사람들에게 제가 별로 소용이 없지요."
낮은 곳으로 찾아가 봉사를 하는 슈바이처, 과연 의사답고 목사다운 사람이다. 의료 봉사 활동에 생애를 바칠 각오를 한 뒤 나이 30세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의과대학 신입생이 되고, 37세에 의사 자격을 얻은 다음 38세에 아프리카로 달려간 사람 슈바이처, 그가 새삼 돋보이는 '대한민국 2020년' 9월 4일이다.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 의대 설립에 반대하여 의사 단체가 파업을 하고,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일부 목사들이 "정권 타도!"를 부르짖는 대한민국에서는 슈바이처와 같은 진정한 의사와 기독교인을 볼 수 없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 역사 속에서 '이태준'을 찾아 독자들께 소개하려 한다.
김원봉이 구술하고 박태원이 기록한 <약산과 의열단>에 경성 세브란스 의전 출신 의사 이태준이 나온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가봉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듯이 이태준 역시 "병에 걸리면 기도나 드리고 주문이나 외우고 하는 미신적인 요법밖에 모르는 지방(외몽고)에서 단 한 사람 양의"로서 "성가(聲價)가 높았다." 그는 이내 왕궁까지 출입하게 되었지만 그에 멈추지 않고 북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외몽고의 슈바이처' 이태준
이태준이 가입했을 무렵 의열단은 부산 경찰서 투탄, 밀양 경찰서 투탄, 상해 황포탄 일본군 육군대장 저격과 투탄, 조선총독부 투탄 등 여러 거사를 진행한 직후였다. 의열단의 거사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민중을 각성"시켰지만 일본인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외에 뚜렷하게 적의 심장부 건물을 폭파하거나 주요 적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애써 제조해 간 폭탄들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뛰어난 폭탄 제조 기술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때 이태준이 "헝가리인 마자알(마자르)을 추천하였다." 이태준은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약소국인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마자알 자신이 가진) 기술이 유용한 것을 안다면 마자알은 기꺼이 약산(김원봉)의 일을 도울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김원봉은 마자알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초조한 날을 보내고 있는 중에 하룻날 뜻밖의 흉보를 받았다. 이태준이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이다." 이태준은 마자알을 데리고 김원봉에게 오던 중 일본인 길전(吉田)이 참모 노릇을 하고 있는 러시아 반혁명군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서양인이라는 이유로 처형을 모면한 마자알은 그 이후 상해의 의열단 비밀 공간에서 현계옥과 함께 폭탄을 제조했다. 그리고 현계옥과 함께 부부로 위장, 폭탄을 압록강 건너로 반입하는 일까지 맡아 성사시켰다. 마자알의 사람 됨됨이를 이태준이 정확하게 보았던 것이다.
의사(醫師) 이태준은 의사(義士) 이태준이기도 했다
의료 후진국까지 찾아가 의사 본연의 임무를 다했고, 독실한 기도교인이었다는 점에서 이태준은 슈바이처의 정신을 고스란히 재현한 위대한 의사였다. 게다가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가는 김규식의 여비 2000원(현 시세 2억 원 수준)을 부담하고, 의열단 단원으로서 맹렬히 항일운동에 복무한 의사(義士)이기도 했다.
2020년 대한민국의 의료계가 어수선하다. 4일, 평행선을 달리던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 등에 대한 협상을 마무리했다. 정부와 의사들의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지던 근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슈바이처와 이태준의 생애가 좀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이태준은 기림을 받아 마땅한 자랑스러운 의사(醫師)이다. 그는 슈바이처보다 8세 아래였지만 슈바이처보다 44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슈바이처의 기일을 맞아 이태준의 명복을 함께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