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할머니와 걷다 돌에 걸터앉았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언제 가장 행복했어?" "행복? 그런 게 없었제." 땅을 짚고 있는 지팡이도 수긍하듯 흔들거린다.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 말이야." 가만 생각하시더니 "네 아부지 낳고 시어미가 업고 자랑 다니느라 안아보지도 못 했다니께. 아를 젖 물릴 때 제일 좋았제."
인생에서 아이에게 젖 물릴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할머니가 두 달 전 소천하셨다. 향년 92세. 식사를 못 드신다고 소식을 들은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치매가 있던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셨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면회를 가지 못한 상태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귓가에 낡은 시곗바늘이 멈춘 거 같은 정적이 흘렀다.
장례식장에 7남매 가족 친지들이 모였다. 입관식을 진행했다. 할머니는 빳빳하게 누워계셨다. 장례지도사가 정성스레 염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할머니 얼굴에 곱게 화장하고 몸에 삼베 수의를 입혔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인사할 시간이 주어졌다. 딸들은 "엄마, 사랑해. 보고 싶어" 며느리들은 "어머니,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라며 울었다.
큰며느리인 엄마 차례가 되자 "어머니, 어서 가". 그 말은 흐르는 눈물을 흠칫 멈추게 했다. 평안히 가시라는 의미였을 텐데 할머니를 모시는 동안 고생한 엄마의 속내가 비친 거 같았다. 딸은 엄마를, 며느리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슷하지만 선택한 언어와 메시지는 달랐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지긋하게 눈을 감은 할머니 얼굴이 보인다. "할머니, 강아지 왔어요." 강아지 왔냐 하는 할머니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거 같다. 딱딱하게 굳은 팔을 매만지며 솟구치는 감정이 터졌다. "할머니는 가장 약한 사람이었어요!" 생전에 할머니에게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고 말았다. 삭혀왔던 눈물이 꺽꺽 소리 내며 몸이 휘청거렸다. 앞으로 볼 수 없는 슬픔만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가장 약하고 아팠을 때 버거웠던 지난날에 대한 진한 눈물이었다.
사랑한다는 것과 같이 산다는 것은
할머니는 10년 동안 큰아들, 큰며느리 집에서 사셨다. 내 부모님에게 그 시간은 순탄하지 않았다. 장남과 큰며느리의 무게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었다. 시골에 사셨던 아빠와 엄마는 중매로 결혼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살이가 녹록하지 않았을 텐데 시골에서 줄줄이 올라오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아빠는 10평이 안 되는 가게에서 장사했다. 동생과 처남들이 장사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셨다. 엄마는 시동생과 친동생들의 옷가지를 빨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녹슬지 않는 무쇠처럼 일하셨다. 새벽부터 아빠는 출근했고, 엄마는 삼촌들과 고모들 틈에서 삼 남매를 키웠다. 시간이 흘러 동생들이 자립하고, 자식들이 분가하자 혼자 생활이 어려워진 할머니는 서울로 오셨다. 칠순이 넘은 부모님은 장남과 큰며느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 막 자유를 찾은 엄마의 시간과 공간에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아빠가 할머니와 정답게 이야기하면 엄마는 속상해하셨다. 남편을 뺏긴 아내는 시어머니가 야속했는지 할머니가 눈치가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가 퇴근하기를 꼭 기다렸다 아들의 얼굴을 보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빠는 항상 할머니 편을 드셨고, 할머니를 위해 엄마와 싸우셨다.
엄마의 우울증은 갑상선에 혹으로 번졌다. 혹이 커져 목구멍을 누르면 엄마의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갈래갈래 갈라졌다. 엄마는 그런 목소리로 내게 쏟아냈다. 엄마의 편에서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난 하수구처럼 엄마의 고된 감정을 받아냈다. 그때마다 엄마를 동정했고, 또 할머니를, 아빠를 동정했다.
아무도 할머니를 모시고 싶지 않은 분위기에서 할머니는 가족 언저리에 계셨다. '엄마'를 필요로 하던 자식들은 커버렸다.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산다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할머니는 삭신이 쑤셔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거 같다고 하셨다. 지팡이를 쥐고 몇 걸음 걷다 멈추시고 주저앉아버리셨다. 고통 앞에서 아파하셨고 무력하셨다. 난 그저 늙음이 화가 났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형제들은 할머니를 요양원에 가시는 게 낫겠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형제들은 시어머니를 딸처럼 살뜰히 사랑하지 못한 큰며느리에게 서운함을 표현했다. 아빠는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낼 수 없다고 끝까지 엄마에게 책임을 넘겼다. 아들도, 딸도 하지 못한 일을 며느리가 했지만 아무도 엄마의 편이 없었다. 엄마는 한계에 다다랐지만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마음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치매가 중증이 되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집을 걸어 잠그고 문을 열지 못하는 등 몇 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던 날, 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울었다. 그때야말로 할머니가 멀리 떠난 거 같았다. 할머니를 자주 볼 수 없다는 허전함과 엄마를 생각하면 좀 나아질 거라는 안도감, 책임이 강한 아빠가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애석함 등 복잡한 감정이 출렁였다.
형제들은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에게 자주 찾아갔다. 할머니는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마지막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형제들은 장남이 모시는 엄마가 아닌, 자신이 사랑했던 엄마를 보기 위해 열성적으로 면회했다. 어쩌면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들의 무게는 비슷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일 년 정도 자식들에게 사랑받다가 눈을 감으셨다. 숨이 멎는 순간에 표정 한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평안하고 고요한 죽음이었다. 그때가 되자 할머니의 진가가 보였다.
사랑밖엔 몰랐던 할머니의 마지막은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볼멘소리를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 며느리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화를 낸 적이 없어서 천사로 불리셨다. 자신의 손에 들려진 떡 한 조각도 옆에 있는 이에게 먼저 건네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보다 열 살 많은 할아버지에게 온갖 구박을 당했을 때도, 아빠와 엄마가 불같이 싸울 때도 할머니는 돌아서서 웃으셨다. 허탈한 웃음. 할머니는 허탈하게 웃고 탈탈 털어버리실 뿐이었다. 기억이 소멸했을 때도 할머니는 눈만 마주치면 빙그레 웃으셨다. 할머니가 인생에 순응하신 건지, 인생이 할머니에게 순응한 건지 모르겠다.
젖을 물려 자식에게 흘려보내는 것처럼 자신을 비워내는 할머니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입관부터 발인까지 육신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자식에게 뼛속까지 자신 낱낱을 풀어헤쳐 보이시고 내어주시는 거 같았다. 결국에는 몸이 으스러지고 부서지도록 자식을 사랑한 흔적이 뼛가루가 된 거 같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엄마의 마음처럼, 인생을 자식들에게 바쳐온 삶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마지막까지 보여주셨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죽음을 호상이라고 했다. 세상에 수많은 버림받은 노인보다 복 받으신 거라 했다. 위로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부담스러워지는 말년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의 환희로 가득 찬 눈동자에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외로움이 들어차는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셨는지 짐작되지 않는다.
엄마는 추모관을 자주 찾아가셨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추모관에 홀로 가셔서 꽃을 넣어드렸다. 장마로 인해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엄마는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가셨다. 엄마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셨다. 엄마에게 시간이 필요할 게다. 큰며느리의 굴레는 벗겨졌지만 자신의 한계를 부대끼며 감당한 며느리가 겪어야 하는 후폭풍은 질기고 세다.
할머니는 시간에 따라 딸, 아내, 며느리, 엄마, 할머니 그리고 시어머니로 사셨다. 여자로서 겪었던 여러 역할에서 젖을 물려 자신을 내어주던 엄마의 삶이 가장 행복했다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시력이 약해지고, 이가 빠지고, 귀가 어두워져 자식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시간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했던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은, 사랑으로 채워져야 했을 시간이었다. 나는 모든 게 무력해지는 그 시간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통과할 수 있는지 말년이 행복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의 마지막 기억은 어떠신가요? 내 인생에서 가장 나약한 그 시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