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
재택근무 7개월째,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밀린 '숙제'를 처리하기 위해 회사에 나간다. 이 숙제를 해결하는 데엔 꽤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가는데, 바로 홍보용으로 들어온 책 포장을 뜯고 정리하는 일이다.
언론사에는 일주일에도 수십 권씩, 각 출판사에서 보내는 홍보용 책이 배송된다. 소설이나 시 같은 순문학, 인문교양이나 과학 서적, 어린이책에 전집까지. 그야말로 종류 불문인 그 책들을 보고 있자면, 회사 한켠에 작은 책방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언론사는 모르겠지만, <오마이뉴스>에서 매주 쏟아지는 신간들을 정리하고, 기사로 소개할 만한 책을 고르는 건 책동네 파트를 담당하는 라이프플러스팀 에디터 두 명의 몫이다.
모든 게 멈춰버린 코로나 시대라지만, 책은 잘도 나와서 몇 주 정리 작업을 소홀히 하면 사람 키 높이 정도는 거뜬히 넘길 수 있는 양이 사무실 한 구석에 쌓인다. 그럴 때면 아예 날을 잡고 편집에 손을 놓는다. 책더미 옆에 방석을 깔고 앉아, 고구마 줄기나 멸치를 다듬 듯 포장을 뜯고 책을 분류하는 '무한 반복 노동'을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꼭 지루하기만 한 작업은 아니다. 흠집 하나 없이 말갛게 코팅된 각양각색의 새 책들을 구경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다. 잘 빠진 제목에 딱 들어맞는 표지를 입힌 책을 만나면 마치 내가 그 책의 저자나 편집자라도 된 양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분명 에디터가 읽고 서평을 쓸 수 있는 책의 양은 한정돼 있는데, 포장지에 싸인 책을 랜덤으로 골라 잡아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 서평을 쓸 만한 책을 고르기 위해선 한 권의 예외도 없이 포장을 풀러야 한다. 노끈을 자르고, 종이 봉투를 뜯고, 책을 감싼 비닐을 벗기고, A4용지에 반듯하게 인쇄된 보도자료를 따로 빼놓고, 책을 한 권씩 무너지지 않을 높이로 적당히 쌓는다.
이걸 반복하다 보면 여러모로 '현타'가 온다. 손끝이 너덜해지고, 허리가 뻐근해지고, 눈이 침침해져 코 앞에 책이 그저 종이 무덤처럼 보이는 순간이 온다. 이럴 땐 보통 머릿속에 딱 두 가지 생각이 맴돈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책이 출간 되나, 쓰레기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 몸이 힘들어서 나오는 투정이기도 하지만, 책을 읽자고 수많은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다는 일종의 죄책감에서 나오는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노고와 정성을 알기에, 어떤 책을 출간하는 건 그냥 종이 낭비란 얘기를 하고 싶진 않다. 대부분의 책은 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비판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그 내용을 해석해주는 독자를 만날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사랑 받는 책이냐를 기준으로 책의 쓸모를 판단하고 싶진 않다. 출간할 가치가 있는 책과 없는 책을 구분하는 건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앞서 책 정리 업무를 설명하며 잔뜩 앓는 소리를 늘어놨지만, 아직 서점에 깔리지도 않은 새 책들을 별다른 조건 없이 먼저 받아볼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이 감사한 선물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 순 없는지, 함께 딸려오는 수많은 쓰레기들을 좀 줄일 순 없는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하기가 아닌 빼기로 시작하는 제로웨이스트
<오늘을 조금 바꿉니다>는 이번 책더미 속에서 발견한 신간이다. 앞서 언급한 고민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준 책이랄까. '일상에 작은 습관을 더하는 제로웨이스트 라이프'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슈퍼 게으름뱅이'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쓰레기 '제로' 습관을 알려준다. 마치 제로웨이스트 입문서 같다.
제로웨이스트 스토어 운영자, 일회용품 없는 카페 주인장부터 프리랜서 에디터, 번역가, 공간 큐레이터까지. 쓰레기 줄이는 삶을 먼저 경험해본 여섯 명의 선배들이 공동 저자로 나섰다. 이들은 아이나 반려견을 키우는 가정, 캠핑을 가거나 심지어 결혼식을 준비하는 경우까지 상황별로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한 꿀팁 74개를 차근차근 방출했다.
서두에서부터 '정말 쉬운 제로웨이스트 매뉴얼'이라고 강조하듯, 이 책은 정색하고 따라야 할 규칙들을 나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읊지 않는다. 그 대신, '제로웨이스트는 더하기가 아닌 빼기로 시작해야 한다, 당장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원칙 아래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바꿔나갈 수 있는 사소한 부분들을 짚어준다. 또, 현실적인 한계로 친환경적인 방법을 택할 수 없을 때 시도해 볼 만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빵집에서 빵을 살 때 쟁반에 놓여 있던 유산지를 활용해 둘둘 포장하면 굳이 비닐 봉투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선물을 포장할 때도 따로 포장지를 사는 대신 철 지난 잡지나 신문을 활용하면 나름대로 독특한 분위기를 내면서 또다른 쓰레기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집에서 음식을 보관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일회용 랩 대신 광목천에 밀랍을 입힌 랩을 사용하면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하다.
또, 카페나 상점엔 가능하면 개인 용기를 들고 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부득이하게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때는 리뷰를 찾아보고 그릇을 수거해가는 식당을 이용한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면, 컵 대신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콘으로 주문한다. 물건을 구매할 때는 영수증을 '버려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영수증을 안 주셔도 괜찮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너무나 사소해서 좀 만만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내용들인데, 그래서인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쌓이기 보다 '이 정돈 해볼 수 있겠다'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긴다. 꼭 저자들이 제로웨이스트계의 백종원 같달까.
이들은 강조한다. 제로웨이스트를 시도하는 동기가 대단치 않아도 된다고. 게으르고 관대한 실천도 가능하다고. 취향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도 괜찮다고. 작은 미션에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실천을 자연스럽게 알리라고. 내가 먼저 해보니 "시작이 어렵고 편리함은 줄었"지만, "기꺼이 시작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불편함이니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고.
물론,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제로웨이스트 '입문서'다. 책에서 소개하는 방안을 도장 깨듯 하나하나 실천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딱 74가지 방안이 정답은 아니다. 제로웨이스트는 정형화된 몇 가지 실천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를 바꾸는 것에 가깝다.
책을 뛰어 넘어, 스스로 일상을 둘러보며 변화시킬 부분들을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아무리 가벼운 동기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당면한 기후 위기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환경 문제에 대한 공부와 고민을 더 심도 깊게 이어가야 한다.
또,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그저 자기 만족에 그치지 않으려면 내 주변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그래도 겁먹을 필요는 없다. 먼저 경험해본 저자들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제로웨이스트 실천에 거부감이 없다고 입 모아 말한다. 잠시 잠깐 낯설게 보는 시선은 있을지언정, '유난 떤다'고 면박을 주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제로웨이스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뜻밖의 동지를 꽤 만나기도 했단다. 저자 중 한 명인 정다운 보틀팩토리 대표는 단골 빵집에 가면 이제 더이상 '비닐 봉투를 주지 말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빵집 사장님이 그를 기억하고, 자연스레 종이 봉투를 내어주기 때문이다.
한 번은 사장님이 "우리 집도 이제 비닐 조금 덜 쓰고, 바뀌어야 하는데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단다. 그 빵집이 당장 비닐봉투를 없애진 않았지만, 적어도 사장님이 그간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지점을 건드려준 것이다. 내 주변에서 시작하는 소소한 실천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정 대표가 '채우장'을 열었을 때 일화도 인상 깊다. 채우장은 그가 기획한 행사로, 한 달에 한 번 소규모 생산자가 포장 없이 물건을 판매하는 동네 장터다. 정 대표가 채우장을 처음 구상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게 되겠느냐'며 의구심이 가득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1년 뒤, 채우장은 공간이 부족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터가 됐다. 정 대표는 그 이유를 한 손님이 남기고 간 말에서 찾는다.
담을 용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장터, 전날 무엇을 살지 정하고 열탕 소독을 해야 올 수 있는 장터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오는 이유는 뭘까. 언젠가 채우장에 오셨던 손님이 남겨 주었던 글이 기억에 남는다.
'의외로 소비자는 준비되어 있다. 이제 판매자가 바뀌어야 한다.' -34쪽
다 읽은 책으로 종이 무덤을 만들지 않으려면
다시, 처음의 '숙제'로 돌아와서. 내가 읽은 책, 그리고 그 책을 감싼 포장재가 내가 죽을 때까지 썩지 않고 지구에 남아 있거나, 환경 파괴에 일조하길 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낯섦이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준비된' 소비자를 향해 출판업계가 시도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또다시 책더미들 속에서 힌트를 얻는다. 먼저 <오늘을 조금 바꿉니다>부터. 이 책 맨 뒷면엔 '표지와 본문은 FSC 인증을 받은 용지에 콩기름 잉크로 인쇄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FSC는 국제산림관리협의회의 약자로, 이 단체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한 상품이나 종이 등에 이와 같은 인증을 부여한다. 이 인증을 받는 과정에서 불법 벌목된 목재를 사용하거나,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는 지역에서 생산한 재료가 쓰였는지 확인한다고 한다.
또, 콩기름 잉크는 석유 화합물이 아닌 대두유를 원료로 사용하는데, 이를 사용해 인쇄하면 대기오염 물질의 발생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품 폐기시 분해가 더 쉽다고 한다. 쓰레기를 아예 '제로' 상태로 만드는 방식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들에게 읽히고 난 그 이후까지 고려해 친환경적으로 책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JTBC <비정상회담>으로 한국에 이름을 알린 방송인, 타일러 라쉬씨가 지난 7월 기후위기에 대해 쓴 책 <두 번째 지구는 없다>를 낼 때도 FSC 인증을 받은 용지와 콩기름 잉크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 두 책 모두 홍보 문구를 넣어 표지에 두르는 띠지를 과감히 생략했다.
이번에 온 신간 중, 한국여성재단에서 발행한 <여성의 미래 펀딩하다>도 눈여겨볼만한 사례였다. 이 책은 다른 서적과 달리 '썩는 택배 봉투'에 담겨 배송됐다. 봉투의 오른쪽 모서리에는 '환경에 무해한 100% 생분해성수지(EL724)로 제작되었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꽤나 인상 깊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제는 리사이클(재활용)이 아닌, 리그라운드(다시 땅으로) 하세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제로웨이스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당장 모든 출판사가 FSC 인증을 받고, 콩기름으로 책을 인쇄하고, '썩는 택배 봉투'를 사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책의 생산, 유통 과정을 친환경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혁, 추가 비용과 번거로움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점점 쌓이고, '준비된 독자들'이 이러한 시도를 부지런히 언급하고 응원한다면, 출판업계도 차츰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비닐을 좀 덜 써야 할 것 같다'며 말을 건넨 빵집 사장님처럼 말이다. 하다 못해, 불필요한 띠지를 빼는 건 별다른 비용이나 시스템 변화 없이 지금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우리에겐 분명 다른 선택지가 있고, '오늘을 조금 바꿀' 힘이 있다. 지금부터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쓰레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고 그 무엇도 해치지 않는, 그야말로 '무해한 책'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