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박사인 그는 나와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 동료였다. 필자가 진실위에 근무했을 때 제주 4.3항쟁과 관련한 국제회의차 제주도로 함께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바닷가 숙소 주변을 함께 걸으며 그는 자신이 과거 청산 운동에 몸담게 된 계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친은 6.25 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근무했던 해병대 장교였다. 어려서부터 그는 부친으로부터 한국전쟁 초기 제주지역의 '빨갱이를 학살'한 무용담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으며 자랐고 그런 부친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들은 '빨갱이 학살 무용담'에 등장하는 희생자들이 부친이 항상 주장했던 '빨갱이'가 아니라 아무 죄 없는 그냥 민간인들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런 역사의 진실을 모르고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부친의 '죄'를 속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과거 청산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럼 6.25전쟁 초기 당시 제주도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50년 6.25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경찰국에 제주 지역의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제주 모슬포경찰서는 관할 지서에 예비검속 대상 주민들을 연행해 구금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들은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어업조합창고 등에 구금되었다.
모슬포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경력을 조사하고 명부를 작성했다. 경찰은 예비검속자들을 개인별로 심사해 D․C․B․A의 4등급으로 분류했다. 이 가운데 B․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되었고, D․C급은 1950년 7월 16일과 8월 20일 해병대에 송치되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는 344명 민간인을 예비검속해 이 가운데 D․C급 252명을 해병대에 송치했다.
진실위 조사결과 D․C급으로 분류되어 송치된 예비검속자 중 218명은 해병대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이 학살된 장소는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탄약고로 쓰이던 굴속과 그 주변이었다.
[관련기사]
성산포경찰서장, 한국판 쉰들러였다(http://omn.kr/b3o5)
굴 입구에 세워 놓고 학살
1차 학살은 해병대 모슬포부대에 의해 1950년 7월 16일~20일에 집행되었다. 이 때 모슬포 해병대원들은 총살 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미리 도착해 일렬 종대로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에 실려 온 민간인들을 한 사람씩 끌고 가서 굴 입구에 세워 놓고 학살했다. 2차 총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에 의해 1950년 8월 20일에 집행되었다. 해병대원들은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군 트럭을 이용, 1차 총살 때와 같은 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진실위 조사결과 이 사건 희생자 전체 218명 중 교사 11명, 공무원 5명, 마을유지 5명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약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주경찰은 6.25 이전부터 과거 좌익 활동이나 제주4․3사건 관련자들을 주요 사찰대상자로 선정해 동향을 사찰해 왔고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곧바로 예비 검속했다. 이승만 정권의 예비검속은 6.25직후 이른바 '불순분자'를 구속해 전시 치안질서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일부 영향력 있는 이들까지 학살했다.
이 사건 희생자 중에는 교사를 포함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층과 공무원 이장 등 4․3사건과 무관한 지역사회 지도층도 포함되었다. 전체적으로 경찰의 예비검속자 분류기준은 공정하지도 않았고 매우 자의적이어서 구체적인 행동여부와 무관하게 의심만으로도 군 송치대상에 포함되었다. 진실위 조사결과 본 사건 희생자 대부분은 좌익 활동이나 4․3사건과 별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밀고, 모략, 경찰과의 불화, 개인적인 감정 다툼으로 예비 검속되어 억울하게 학살된 경우가 많았다.
1950년 8월 20일 새벽 학살 현장에 있던 이아무개는 "당시 총살 현장을 처음 목격하고 시신 27구를 수습했는데 희생자 시신에는 총상 흔적이 아주 많았다"라고 지난 2006년 6월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무릉지서 의용소방대원으로 수감된 예비검속자들의 경비를 담당했던 변아무개는 "예비검속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수감자 중엔) 대한청년단원 출신자들이 많이 검속되었고 경찰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끌려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경찰한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라고 지난 2006년 5월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당시 정보부 하부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예비검속 생존자 윤아무개는 "예비검속 당시 교사, 면사무소 직원 등 공무원 희생자가 많은 이유가 정보원의 모략 때문으로 추정한다"라고 지난 2007년 5월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얌전히 있던 사람들 끌려가서 다 죽어"
모슬포경찰서 두모지서에 근무했던 고아무개는 사건 당시 "도망갈 사람은 이미 다 도망가고 한라산 공비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지방에서 얌전히 있던 사람들이 끌려가서 다 죽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희생자 김하종은 4․3사건 당시 서귀포경찰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1950년 3월 안덕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족들은 김하종이 학살된 이유가 "4․3사건 당시 경찰로 근무할 때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모략했을 수도 있고, 그가 안덕면 1등 부자 소리를 듣는 유지였기 때문에 시기해서 모략한 것으로도 생각"했다. 또 "그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온 것을 이유로 좌익사상자로 밀고가 들어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다른 희생자 김원봉의 유족은 당시 "누이를 마음에 둔 무릉지서 경찰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보복으로 모략(학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희생자 김대수는 한림중학교 재직 당시 "서청 출신 교사들과 사이가 좋지 못해서 서청 출신 교사의 모략으로 학살되었을 것"으로 유족들은 추정했다.
희생자 김응흡은 당시 고산리에서 "얌전하고 어진 사람으로 인기가 많았는데, 마을 청년들의 시기·모략으로 희생된 것"으로 유족들은 추정했다.
희생자 이재근은 "가파리 유지급으로 재산이 많았는데 이를 시기한 가파리 청년단과 모슬포경찰서 파견 경찰의 모략으로 학살되었다"고 유족들은 주장했다.
희생자 이자익은 모슬포경찰서 고아무개 형사가 "상모리의 모 여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악감정으로 모략(학살)한 것"으로 유족들은 주장했다.
이 사건 관련 유족들은 억울하게 학살된 가족의 한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안고 살아왔다. 유족들은 가족이 학살 당한 후에 정신적,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박탈감 속에서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다. 유족 중엔 가족이 희생된 후 모친이 화병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가족이 갑자기 학살당한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출해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었다.
유족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정상적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으며 경제적으로 늘 빈곤했고 학업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학살당한 여성들은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을 쓰고 홀몸으로 자녀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또한 남편이 학살된 여성 중엔 생계를 위해 재가한 경우도 있었고 모친이 재가한 후 아들이 자살하는 비극도 있었다.
"특이한 동향 없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한편 이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진실위는 제주 모슬포 예비검속자들이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근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제주지역의 예비검속과 관련해 내무부 치안국과 제주도경찰국, 제주도경찰국 관할 각 경찰서, 특히 제주도경찰국과 모슬포경찰서 사이에 지시 보고된 문서에서 제주지역 보도연맹원을 언급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모슬포경찰서에서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검거·구속해 등급별로 평가한 예비검속자 명부나 총살자와 가족 명부에도 보도연맹원 관련 언급이 전혀 없었다. 특히 이들 명부에는 희생자 개인별 범죄 개요나 좌익 단체, 소속 지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도 보도연맹원 가입 여부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1950년 6.25 직후 제주지역 예비검속과 관련된 경찰 공식문서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이들 자료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는 사실은 기록자의 실수라기보다는 제주지역 경찰이 육지의 보도연맹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예비검속을 했다고 진실위는 해석했다. 무엇보다 제주지역에서 경찰의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보도연맹원으로 범주화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 당시 성산포 경찰이었던 문아무개 등 경찰 참고인들은 "제주도에는 보도연맹이 조직되지 않았으며 사건 발생 당시에도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또한 유족 조사에서도 본 사건 희생자들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진술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통상 제주지역 예비검속자들을 보도연맹원이었다고 판단한 것은 전쟁 직후 육지에서 경찰이 과거 좌익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을 구금이나 처형했던 사실을 유추해서 제주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진실위는 판단했다.
이외에도 모슬포 예비검속자 명부에 나타나는 희생자 범죄 개요나 최근 동향 항목에 기재된 내용도 매우 자의적인 것으로 진실위는 판단했다. 예를 들면 "만일의 경우에는 폭동을 야기할 우려 농후함", "특이한 동향 무하나 만일의 경우를 우려함", "반성한 듯하나 반관(反官)적 태도가 보임", "반성적 태도가 보이나 만일을 우려함", "협력하는 태도이나 주거 지역으로 보아 만일의 염려", "개전지정이 유하나 만일이 염려됨", "평소 태도 애매하며 만일의 경우에는 우려됨", "제반사에 협력하는 듯하나 동향 극히 애매함"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확고한 사상을 표현치 않고 중간적 태도를 취함", "확실한 범증은 무하나 시국하 군관민의 이간책을 상습으로 하는 자" 등의 내용도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예비검속자들이 직접 행동은 하지 않았더라도 의심스러운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학살되었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덜 죽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한편 1950년 7월 20일 학살에 참여했던 해병대 모슬포부대 이아무개는 당시 상황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50년 7월 중순경, 소대 분대원 모두를 연병장에 집합시키더니, 분대원 약 20여 명을 차출해서 트럭에 태워 이동시켰다. 도착한 곳은 일본 해군 방공호가 있고, 격납고가 여러 곳에 있는 비행장 같은 곳이었다. 현장에 중대장, 소대장이 도착해 있었다. 트럭에서 내리자, 분대장이 총알을 하나씩 나눠줬다. 총알을 다 나눠준 후, 중대장이 '지금 이곳으로 폭도를 데리고 오는데, 이 폭도들은 빨갱이 앞잡이들이니 한 사람이 한 명씩 사살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잠시 후 트럭 한 대가 들어오더니, 트럭에서 민간인 약 20여 명을 내려 우리 옆에 한 사람씩 세워 놓았다. 민간인을 한 사람씩 데리고, 약 10~20여 m를 걸어 올라가 호 가장자리에 한 명씩 세워놓고 총살해 시신이 호 안으로 떨어지게 했다. 한 명씩 총살을 집행했는데, 덜 죽은 사람들의 꽥꽥 소리가 나고 그렇게 민간인에 대한 양민학살이 있었다. 총살집행이 끝난 후 돌아오는 길에 다른 트럭이 그 현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민간인을 계속 실어 오는 것 같았다.
1950년 7월 16일~20일 1차 예비검속자 총살에 참여했던 모슬포부대 분대원 이아무개도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총살 후 자연적으로 시신이 호 안으로 떨어지게 민간인을 호 근처로 세워놓았는데, 호 안에서 사람 신음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시체가 쌓여 있는데, 이미 몇 번의 총살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한테 배당된 민간인은 30~40대 여자였습니다. 총살 준비를 마치고 총을 겨눴는데, 순간 제 뒤에 서 있던 중대장이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지금 생각에는, 제 총부리가 정확히 겨눠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대장이 '어이! 너 이쪽으로 나와!" 라는 명령에 저는 뒤로 물러섰습니다. 당시 중대장은 일본 닛폰도(日本刀)를 차고 다녔는데, 갑자기 닛폰도를 꺼내 그 여자를 뒤에서 탁! 찔렀는데, 여자가 한참을 서 있더니 쓰러졌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쪽에서 또 내 뒤의 군인이 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쏘고 꽥꽥 소리가 나고, 아직 덜 죽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민간인에 대한 양민학살이 있었습니다. 내가 산 증인입니다.
불법으로 민간인 학살한 이승만
이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의 예비검속은 일제강점기에 실시되다가 해방 후 폐지되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던 제도였다. 그러나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제주지역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도 근거하지 않은 채 예비검속을 불법적으로 실시했다.
이승만 정권은 6.25 발발 후 민간인 처벌의 법적근거가 되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6월 25일 발표하고 이어 7월 8일에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제주지역 예비검속 당시에는 어떠한 법령도 적용하지 않았다.
지난 2007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제주주둔 해병대사령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정부의 공식적인 계엄령선포 이전에 불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행정과 치안을 관할했다.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는 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계엄령에 근거, 예비검속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민간인을 체포 구속해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했다. 계엄사령부의 이러한 조치는 불법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계엄법의 관련 조항 및 규정도 위반한 것이었다. 또 계엄사령부는 계엄령에 따른 처리기준이나 군법회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자들을 집단 총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