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은 오랜 장마와 태풍으로 채소값이 고공행진이었다. 명절이 지난 지금, 조금 내린 듯하지만 아직은 여전한 것 같다. 비싼 와중에도 명절에 맞는 음식은 해야 하니 나물도 종류별로, 채소도 종류별로 샀고, 고기와 생선도 조금씩 샀다. 특별히 떨이로 싸게 파는 것들은 넉넉히 욕심을 부려 사기도 했다.
명절 음식을 하나하나 마무리하며 남은 채소들은 냉장고에 차곡차곡 잘 넣어 보관했다. 하루 이틀 삼일... 시간이 지나가니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것들이 나를 본다. 보관해 둔 채소들이 신경 쓰여 더는 그냥 둘 수 없다. 호박, 버섯, 감자, 양파, 쪽파 등, 상해서 버려지지 않도록 무엇이든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감자야 흙이 묻어 있으니 조금 오래 두고 먹어도 될 것 같지만 호박 등은 빨리 해치워야 할 것 같다.
두부조림과 비슷한 방법으로, 호박을 조리한다. 호박을 0.5mm 두께로 썰어 찹쌀가루를 살짝 묻히고 기름을 두른 팬에 부친다. 적당한 센 불에 호박이 노릇노릇 앞뒤로 익어갈 즈음 간장에 쪽파와 양파를 쫑쫑 썰어 넣고 참기름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양념장을 호박 하나하나에 정성껏 바른다. 찹쌀가루를 묻힌 호박은 양념장이 잘 스며든다. 맛있는 양념이 빨갛게 물든 호박을 접시에 담는다.
내친김에 명절에 쓰고 남은 녹두가루도 처리하기로 한다. 양념을 씻어 내고 냉동실에 얼려 놓았던 묵은 김치를 꺼내 쫑쫑 썰어 반죽에 넣는다. 남은 쪽파를 적당한 크기로 숭덩숭덩 썰어 넣고, 달달한 식감을 위해 양파도 듬뿍 넣어 한입 크기로 부쳐낸다. 화려한 멋은 없지만 말 그대로 집밥을 위한 반찬 한 가지가 또 완성된다. 내 맘대로 만드는 녹두전이다.
어떻게 만들어도 실패가 없는 것은 달걀말이다. 우리 집 달걀말이에는 명란과 청양고추가 들어간다. 달걀물에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명란의 짭조름한 맛과 청양고추의 매운맛이 부드러운 달걀 옷을 입으면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칭찬에 후한 딸은 한 숟갈 뜰 때마다 맛있다며 거듭 말한다. 늘 덤덤하게 먹는 아들도 한 마디 거든다. 호박 부침에 양념을 얹은 것은 자기도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가리는 것 많은 아들이 가끔 의외의 음식을 자신의 입맛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시골에 벌초하러 가서 지인의 밭에서 따온 깻잎으로 간장조림을 해 놓았을 때에도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뜨거운 밥에 싸서 맛있게 먹기도 했다.
자잘한 반찬이 마련되었으니 국이나 찌개가 필요하다. 딸은 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좋아한다. 때문에 우리 집은 누군가의 생일이 아니어도 미역국을 자주 끓인다. 미역과 고기를 냄비에 넣고 들기름에 달달 볶은 후 마늘을 적당히 넣어주고 물을 부어 오래 끓여주면 맛있는 미역국이 완성된다.
고기가 부족한 듯하면 굴이나 조개를 넣으면 맛이 더 진해진다. 얼마 전 들어온 전복에서 따로 떼어 보관했던 전복 내장을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해동 후 잘게 다져 고기를 조금 넣은 미역국에 넣으니 그 어느 때보다 진한 국물이 완성되었다. 큰 냄비 가득 끓인 미역국은 바로 바닥을 보인다.
가족들 모두 자잘한 밑반찬을 즐기지 않는다. 멸치 볶음을 해 놓아도, 손이 많이 가는 무말랭이나 콩자반을 마음먹고 해 놓아도 만든 날 한 끼만 먹고는 냉장고로 직행한다. 장아찌는 시어머님이 보내주시는 것이 냉장고에 종류별로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추절임, 양파 절임, 오이절임 등의 것들은 발효와 숙성의 효과를 맹신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육류를 좋아한다. 생삼겹살이나 목살 등을 굽고 자잘한 반찬에 장아찌를 종류별로 조금씩 꺼내 놓으면 아이들을 위한 집밥 한 상이 완성된다. 함께 먹을 때면 남은 반찬을 버리기 아까워 조금씩 밥을 더 먹게 된다. 짠 것을 반찬으로 먹으니 밥도 많이 먹는다. 허무한 배부름에 살은 덤이다. 나의 뱃살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
집밥에서 벗어나는 하루
이런 내게도 숨통이 트이는 날이 있다. 주로 차 안에서 즐기는 여행이지만 마음껏 자연의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시간이다. 가까운 근교의 꽃밭이나 잘 다듬어진 정원, 언덕 등 자연 그대로 보아도 좋은 곳들로 바람을 맞으러 간다. 그러다 배고프면 눈에 띄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특별히 염두에 둔 맛집이 근처에 있으면 그곳을 찾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오가다 만나는 식당을 이용하는 편이다. 배고픈 여행객의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가끔은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맛있는 집을 만나는 행운도 있다.
그렇게 만난 집이 김포의 '광수네'다. 올 봄, 강화에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었는데, 알고 보니 꽤 유명한 곳이었다. 이미 방송을 여러 번 탔던 일산의 '광수네'는 김포점 사장님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곳이라고 한다. 제주에서 올라와 일산에서 터를 잡은 부모님의 식당은 이미 많이 알려졌고, 아들이 김포에서 영업을 시작한 것이 1년 반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는 이 집의 초창기부터의 단골손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잘 구워진 고등어구이와 간장게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곳. 이곳에서는 적당히 먹는 것이 쉽지 않다. 욕심껏 먹게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맛이다. 제주 해물 요리 전문점이라고 쓰인 간판. 얼핏 보면 동네의 평범한 식당 같지만 막상 음식이 나오면 해물 요리 전문점에 걸맞은 상차림이 완성된다.
늘 먹던 고등어구이, 껍데기도 부드러워 잘 씹히는 황게로 만든 간장게장과 진한 국물의 성게 미역국까지. 셋이 가면 거기에 꽃게가 가득 들어있는 해물 뚝배기를 점심 메뉴로 먹을 수 있다. 시원한 맛을 원한다면, 제주의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시원한 물회가 좋고, 고기를 좋아하면 차돌박이와 숙주가 들어간 해물 차숙이를 먹어도 좋다. 모든 주재료는 제주도에서 공수해 온다고 말한다.
유독 이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이런저런 말이 사라진다. 오로지 먹기에 열중하는 시간이다. 식사가 끝나면 너무 잘 먹은 포만감과 함께 지나치게 몰입한 민망함에 저절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씹는 소리와 후루룩 넘기는 소리만 있는 조용한 식사를 하고 난 테이블은 늘 제로 웨이스트(Zero-waste). 말 그대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빈 그릇만 남는다.
빈 상을 마주하면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다. 중국식 식사예절은 배부르게 먹었다는 것을 음식을 남기는 것으로 표현한다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이니 혹시나 예의에 어긋날까 싶은 마음은 빨리 지워버린다. 그럼에도 따라오는 약간의 민망함을 환경을 지켰다는 마음으로 상쇄해 본다.
먹고 나서 상을 치우면 다시 밥 때가 되는 주부의 도돌이표 일상. 늘 끼니를 챙겨야 했던 부담과 묵은 피로는 어느새 사라진다. 오로지 나를 위해 잘 차려진 상, 그것에 충실했던 시간. 한동안은 일상에서의 반복된 부대낌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다시 삼식이 엄마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