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해졌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곳, 우리의 전통과 민속이 살아있는 곳으로 간다.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뿌리였던 종가가 모여 있는 곳이다. 우리의 건축사는 물론 옛사람들의 생활사까지 엿볼 수 있는 전통의 장흥 방촌마을이다.
길게 흥한다는 장흥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고을이다. 기행가사의 효시로 통하는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1522∼1556)이 장흥에 살았다. 임금이 중심을 잡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만언봉사'를 정조한테 건의한 존재 위백규(1727∼1798)도 장흥사람이었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의 태 자리도 장흥이다. 장흥을 '문향'이라 부르는 이유다.
방촌은 장흥을 대표하는 인물 존재 위백규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수백 년 동안 씨 내림을 해온 장흥 위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아주 오랜 옛날 장흥의 가온누리였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 속한다.
일찍이 벼슬은 포기했으나
존재를 장흥읍과 관산읍에서 동상으로 만난다. 읍내에선 앉아있는 좌상으로, 관산에선 입상으로 서 있다. 존재는 1727년 방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대부였다. 하지만 과거시험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을 포기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을 수양하며 지역을 바꾸는 데 힘을 썼다.
존재는 당시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낡은 제도를 고치고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재는 "힘 있는 부자가 더 많이 소유를 하고, 부자들이 사치를 한다"고 직격을 날렸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곤궁해진다"면서 부익부 빈익빈을 지적했다.
존재는 "부자의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부자에게 세금을 제대로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한테는 잡다한 세금을 면제해주고, 자력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제시했다. 지금 들어도 혁명적인 정책이다.
존재는 또 "향촌이 인사와 재정을 직접 담당하고, 관리의 수를 줄이고, 향촌이 세금을 자율적으로 부과·징수하고, 방위체제도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의 지방자치제보다도 훨씬 앞선 정책이었다.
당시 존재의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글이 피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책도 백성들의 실생활을 토대로 나온 것이었다.
존재는 땅에서 땀을 흘리면서, 부패한 사회를 경험했다. 백성들에 대한 착취현장도 직접 봤다. 농촌의 총체적인 모순이 보였다. 존재는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꼽힌다. 대실학자인 다산 정약용보다도 30여 년 앞서 살았다. 사상도 큰 맥락에서 닮았다. 정약용보다 시대를 앞선 실학자였다.
존재는 천문과 지리에도 능했다. 22권의 문집 <존재집>이 이를 증명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몇십 년 앞선 1770년에 <환영지>도 펴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리서 겸 팔도지리서다.
<지제지>도 냈다. 지제는 천관산의 옛 이름이다. 천관산의 지리와 역사는 물론 계곡과 골짜기, 암자를 소상히 적고 있다. 바위와 봉우리 이름과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존재는 평생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았다. 궁벽한 남쪽 천관산 자락에서 가난한 학자이자 농부로 살았다. 그의 성향이 글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고산 윤선도처럼 '노 저어라', '씨 뿌려라' 하며 시키지 않았다. 늘 백성의 입장에 섰다. 자신이 농사의 주체였다. 농촌에 산 양반, 향반이었다.
천관산도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
방촌마을에 존재의 생가 '존재고택'이 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저만치 천관산도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장흥 위씨 웅천공파의 종택이다. 당대의 유명한 풍수가가 명당으로 꼽은 자리에 지었다. 2층 높이의 기단 위에 안채가 들어서 있다. 서쪽을 보고 있다.
안채 앞에는 1700년대에 지어진 정자 형태의 서재가 있다. 받침돌과 기둥이 300여 년 전의 것 그대로다. 천관산의 풍치를 고스란히 빌려 풍광이 빼어나다. 존재가 부적을 그려 요란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잠재웠다는 연못도 있다.
대개 종가 고택의 마당은 넓다. 하지만 존재고택의 마당은 넓지 않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었다는 걸 짐작케 한다. 꽃이 하나씩 피기 시작하는 동백나무 고목이 집안을 다소곳이 둘러싸고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다.
장천재도 천관산 자락에 있다. 존재가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공간으로 썼던 곳이다. 장천재는 장흥 위씨의 재실이다. 본디 암자였다. 집 좌우에 날개를 한 칸씩 내어 누각을 달았다. 알파벳 H자 모양에다 세 칸의 방을 넣었다.
방촌은 장흥 위씨가 터를 잡고 수백 년 살아온 마을이다. 고택이 많다.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300여 년 전에 지어졌다. 사당이 돋보인다. 판서공 덕화에서부터 지금까지 14대를 양자 없이 혈손으로 이어왔다.
죽헌고택은 안채로 향하는 아기자기한 돌계단이 정겹다. 담 너머 풍경도 일품이다. 오헌고택은 집의 정원이 돋보인다. 신와고택의 민속사료적인 가치도 크다. 하나하나 귀한 유물이다.
마을 입구에 방촌박물관도 있다. 마을에서 나온 장흥 위씨의 고문서와 목판, 유고 등 생활유물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앞 도로변에 국가지정문화재 석장승도 있다.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천관산 억새도 덤으로 만날 수 있다. 천관산 주차장에서 만나는 옛 드라마 <신의> 세트장도 눈길을 끈다. 방치돼 있어 볼품은 없지만, 사진으로 담으면 그럴싸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