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보다 어른이 되고나서 그림책을 더 좋아하게 됐다. 꼬마였을 때도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있지만, 그때는 마치 교과서나 백과사전을 보는 기분이었다. 파브르 곤충기, 시튼 동물기 전집을 읽으며 한글을 배웠기 때문일까?
조금 더 머리가 커서는 어른들이 읽을 것만 같은 책에 관심을 두었다. <데미안>이나 <제인 에어> 같은 이른바 세계 명작을 찾아 읽었다. 정말로 어른이 되면서 봐야 할 책들은 많아졌고, 다시는 그림책을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 그림책을 더 찾게 된 건 왜일까?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글자가 많지 않아 읽기에 부담 없으니까? 그런 이유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 그림책이 주는 메시지의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책장을 몇 번 넘기기만 했을 뿐인데, 그 사이에 내게 오는 감동은 몇 분으로 그치지 않는다.
운 좋은 아기 거북이 클로버의 모험
이번에 만난 그림책 <아기 거북이 클로버> 또한 내게 작지 않은 울림을 주었다. 처음 만난 아기 거북이 클로버의 동그란 눈은 호기심과 두려움,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을 펼치자 나타난 푸른 바다에 내 마음까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클로버는 알을 깨고 나와 바다를 향해 열심히 달린다. 다른 아기 거북이들이 갈매기의 부리에 잡혀가고 커다란 게의 집게발에 가로막힐 때, 클로버는 운이 좋게도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좋아, 이제 됐어!"
바다를 헤엄치는 클로버를 보며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바다 속에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있으니까. 클로버는 정말 운 좋은 거북이인지, 물고기들마저 따돌리고 소라게를 만나 '하얀 바다'로 가는 길을 안내받는다. 그곳엔 하얀 해파리들이 바다 가득 넘실대고 있다.
"그래, 마음껏 해파리들을 먹으렴 클로버!"
나는 또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제 정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책장을 한 장 넘기자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말 그대로 하얀 바다가 맞았다. 해파리들이 아닌 하얀 쓰레기들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잔뜩 먹고 잠든 클로버는 어떻게 됐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운 좋은 거북이도, 아름다운 바다도 없었다
책장을 한 장 더 넘기자 익숙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그 주변을 숲처럼 빽빽이 채운 해양쓰레기들. 뉴스를 볼 때면 심심치 않게 꼭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났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익은 광경을 그림책에서 다시 만난 나는 속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기 거북이가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며 찾은 바다는 아름답지 않았고, 무사히 바다에 도착한 클로버는 운 좋은 거북이가 될 수 없었다. 푸른 빛깔의 바다와 클로버의 용감한 모험에 넋을 잃고 빠져들던 나는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2050년에는 바다에 물고기보다 더 많은 플라스틱이 존재하게 될 것"(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프란스 팀머만스)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요즘이다. 한 해에만 약 3억 8000만 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발생하고 그중 약 800만 톤이 바다로 유입된다고 하니 상상 못 할 미래도 아니다.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꽂혀 괴로워하는 거북이. 플라스틱 고리에 목이 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펭귄. 언제까지 우리가 버린 쓰레기로 고통받는 동물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걸까?
클로버가 하얀 바다를 만날 수 있기를
<아기 거북이 클로버>를 읽으며 마음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만약 이 책을 미래의 내 아이에게 보여줬을 때, 아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바다에 쓰레기가 왜 이렇게 많아?"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또 이렇게 묻는다면?
"비닐봉지를 먹은 클로버는 어떻게 되는 거야?"
가슴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우리의 과제를 매일 미루기만 한다면, 아이에게 이 그림책을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인간은 쓰레기를 던지고, 바다는 그 무심함을 삼킨다. 그리고 병들어간다. 페트병, 비닐봉지, 플라스틱 빨대, 일회용 용기로 가득한 하얀 바다. 그곳에선 운 좋은 거북이 클로버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어렵게 책장을 덮자 그곳엔 바다에서 만난 고래가 클로버에게 한 말이 새겨져 있었다.
"넌 운이 좋은 거북이야. 이렇게 바다에 왔으니 말이다."
그 말을 읽는데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우리는 운이 좋은 인간들이야. 이렇게 바다를 썩히며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클로버에게, 미래의 내 아이에게가 아닌, 나 자신과 지금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더는 미루지 말고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행동부터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말로 운 좋은 클로버가 될 수 있기를, 진짜로 하얀 바다가 그곳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wehasblues)에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