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민주주의, 즉 지방 정치와 자치 분권의 민주주의를 꿈꾼 지도 벌써 26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방의회엔 풀을 죽이는 농약이라도 뿌려진 걸까. 지방의원이 국회의원의 보좌관 노릇을 하고, 지역 살림을 내팽개친 채 정당 활동에만 힘쓴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에 부산에서 실제 구의원을 지냈던 이의 말을 통해 부산 지방의회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짚고,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분석해봤다.
이전 기사에서 볼 수 있듯 지방의회의 현실은 어둡다(관련 기사:
지방의회는 왜 그럴까, 전직 구의원에게 물었다). 지방 자치라는 본래 목적은 희미해지고, 중앙정치에 예속돼 공천에 매달려야 하는 지방의원들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다. 부산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꼽히는 정당공천제나 2인 선거구제 등 문제는 제도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걸까?
부산에서도 흔들리는 풀뿌리 민주주의
최근 부산 지방의회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사하구 ▲해운대구 ▲기장군 ▲사상구 ▲진구 ▲연제구 등의 기초의회가 구의회 의장단 구성과 관련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정당 간 세력 갈등이 고조되면서 의장단에 대한 자리싸움이 이어진 것이다. 기장군에서 진행된 8번의 투표 동안 의장단 보직 한 개를 선출하지 못하는 등, 정상적인 의정활동이 불가능한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사태가 지속되자 결국 시당에서 개입하는 상황까지 됐다. 당론을 위배해 직접 선거에 나서거나, 상대 정당과 야합하는 구의원을 징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여야 모두 부산시당 윤리위원회를 통해 해당 행위를 한 구의원들을 무더기로 제명했다.
이에 부산 지방의회가 지역 살림은 뒷전으로 한 채 정치 싸움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하지만 더 문제인 점은, 지방의회에 대한 비판이 의장단 논란 이전에도 꾸준했다는 것이다. 양미숙 부산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의장단 선거 갈등을 비롯해 구의원들의 부정부패나 의회 업무 처리의 미흡 등은 늘 문제시되고 있었다"라며 "정치 철학이나 소신이 아닌 정당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구의회가, 필요하냐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부산에서 활동 중인 시민단체와 지역민들도 입을 모아 구의원들의 업무 행태를 비판하는 상황이다. 10년 넘게 부산 지역의 문화 부흥 활동을 해온 강민 부산문화연대 대표는 "문화적 잠재력을 한껏 가지고 있는 부산이지만, 이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구의원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라며 "단순히 예산을 끌어오려는 목적으로만 지역 문화행사나 축제를 유치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공천에 목매는 지방의회... 정당공천제 폐지가 답?
이러한 지방의회 문제점들이 정당공천제로부터 비롯됐다는 지적도 꾸준히 있어왔다. 지난 2006년, 본격적으로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가 도입된 이후 이러한 현상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지방의회가 중앙정치권에 예속되면서 정파적인 문제가 늘어났다는 이유다. 지방의원들이 지역 공천권을 쥐고 있는 국회의원의 의전만 신경 쓰고, 지방 자치보다 당론에 의한 정책을 펼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해 부산시 동구와 해운대구에서는 구청장이 당 지역위원장을 겸업해 공천권을 가지기도 했다. 지방의회가 지자체와 중앙정치를 견제·감시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기초의원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시민사회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양미숙 사무처장은 "중앙정치의 논리에 지방 분권의 의의가 훼손되고 지방 정치가 좌지우지되는 현실"이라며 "관련 문제가 산적하다 보니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 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여론에 부응해 정부, 국회에서도 꾸준히 정당공천제 폐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지만 진척되지는 못하는 상태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도 관련 사항을 추가한 '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상임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2018년에는 여야가 단합해 지방선거 2인 선거구제를 확대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거대 양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면 무소속이나 소수 정당의 출마자가 지방의원으로 선출되기 힘든 구조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정당 공천에도 순기능 있어... 천천히 접근해야"
한편에선 지방의회 개선을 위한 정당공천제 폐지는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있다. 성숙한 지방 정치와 중앙정치의 선순환을 위해서는 오히려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지역에서 출발해 중앙으로 입성하는 정치 구조가 형성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유다. 정치 컨설팅 업체 폴리컴의 박동원 대표는 "사실 지방 의원에게 정당 공천을 하지 않는 곳은 전세계에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라며 "정치인이 차근차근 커가는 체계를 위해서는 정당공천제 유지가 합당하다"라고 말했다.
정당공천제가 지방의회의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지방의원에 정당에 속해있어야만 시민사회가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거나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심판하기에 편리하다는 논리다. 양미숙 사무처장은 "정당공천에 의해 시민들이 지방의원들의 기본적 자질을 간편하게 검증하고 판단하는 등의 순기능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전했다.
이에 정당공천제의 폐지 대신 시민사회의 성숙이 먼저 선결돼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방의회에서의 정당 정치를 무조건 규제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정치 사안별로 당론을 따르거나 개인의 소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세부적인 상황에 근거해 시민사회와 언론이 지속적인 견제와 감시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견이다.
박동원 대표는 "정치 상황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해, 정당 정치가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여기는 것은 위험하다"라며 "제도적인 문제보다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지방 정치의 개선에 접근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국내 지방 자치가 부활한 시간이 짧은 만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정당공천제의 허점이나 지방의회의 단점은 지방의회법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의장단 역할 분배 ▲인사권 독립 ▲의원 전문성 제고 등의 문제를 정당공천제로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으며, 세부적인 지방의회법의 개정을 통해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안일규 부산경남미래정책 사무처장은 "지방의원들의 겸업이나 비상근 문제 등 더욱더 현실적이고 미시적인 관점부터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서는 정당공천제 폐지와 같이 다소 비현실적인 방식보다는, 지방의회법을 고쳐나가는 일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