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된 권력이 어떻게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권력을 농단하고 있는지 똑똑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8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공수처법) 개정안'이 법사위원회를 통과하자,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한 말이다. 야당의 반대 속에 이날 통과된 공수처법 개정안은 공수처장 후보추천 의결 정족수를 기존의 6명(전체 7명 중)에서 5명으로, 한 명 줄이고, 정당이 열흘 이내에 추천위원을 선정하지 않으면 국회의장이 대신 추천위원을 선정하도록 한 것이 핵심내용이다. 이를 두고 김 위원장 등 야당은 '선출된 권력'이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권력 농단'이라고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이 말속에는 공수처 자체가 삼권분립의 헌법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라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이는 지난해 공수처법이 패스트트랙에 올랐던 때부터 국민의힘이 공수처 설립을 반대해 온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국민의 힘은 공수처법이 통과된 뒤에도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 선정을 하지 않고 끌어오다 뒤늦게야 추천위원을 선정했지만, 이헌 변호사 등 공수처 자체에 부정적인 인사들을 천거함으로써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지난달 25일 열린 공수처장후보추천위 4차 회의에서는 야당 추천위원들이 입장을 전향적으로 바꿔 협상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최종 후보자에 대한 여야의 '동상이몽' 끝에 합의를 보지 못했다. 야당이 추천한 두 명의 추천위원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공수처장을 추천할 수 없는 '비토권'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1년여간 끌어온 공수처 논란을 짚어보고, 공수처 출범에 따른 과제를 짚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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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가 보장되고, 수사권․기소권을 갖는, 독립적인 권력기관의 수장인 공수처장을 '소수 야당의 비토권'을 전제한 상태에서 여야 합의로 선출한다는 것은, 진영논리가 첨예한 한국정치판에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당으로선 특수통 검사 출신이 공수처장이 됐을 때 살아있는 권력만 들쑤실 위험이 있는 '윤석열 트라우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야당은 사실상 자신들이 공수처장 결정권을 쥐고 있는 비토권을 통해 최대한 '살아있는 권력만 조질 수 있는 후보자'를 선택하려는 욕심이 충돌한 건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이런 동상이몽이 작용해 여당은 판사 출신 공수처장 후보를, 야당은 윤석열 같은 특수통 검사 출신이나 국민의힘에 우호적인 후보자를 선호했다. 심지어 국민의힘이 추천한 공수처장 후보였던 석동현 전 서울동부지검장은 2017년부터 2년간 자유한국당 부산광역시당 해운대갑 당협위원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SNS에 "공수처는 괴물기관"이라고 비판하며 처장 후보를 사퇴했다.
여당이 야당의 '비토권'을 없앤 공수처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데는 야당이 '비토권'을 통해 공수처를 무력화시키려 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처음부터 공수처 자체를 반대했더라도 법이 통과된 뒤에는 '비토권'을 최대한 활용해 정치적 타협을 통해 공수처장을 추천할 기회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합의제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비토권을 야당은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여당이 야당을 달래기 위해 야당의 '비토권'을 법 조항에 넣긴 했지만, 야당은 지난 1월 14일 공수처법이 통과된 후 10개월 넘게, 지난 7월 15일 공수처법이 시행된 후 5개월여 동안 '비토권'을 공수처 출범 무력화에만 활용했을 뿐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었던 비토권을, 소수 야당의 횡포를 합법적으로 활용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책임에서 야당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야당의 비토권을 삭제한 법 개정은 야당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 공수처장을 추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함으로써 자초한 자승자박의 결과라는 것이다. 공수처법 시행 후 지난 5개월 동안, 야당은 '비토권'에 안주해 공수처 무력화에만 눈이 어두웠던 시간이었고, 여당은 비토권을 삭제한 공수처법 개정의 명분을 쌓는 시간이었다. 야당의 정치적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야당의 공수처장 후보 거부권(비토권)... 국민의힘은 왜 고집할까
우여곡절 끝에 공수처법에서 삭제되었지만, 민주주의 원리에서 보면 야당의 비토권이 반드시 야당에 좋은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오늘의 집권당(지배자)이 내일엔 야당(피지배자)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야당(피지배자)이 내일엔 집권당(지배자)이 될 수 있다'는 이념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체제다. 국민의힘이 지금은 야당이지만 다음 대선에선 언제든지 여당이 될 수도 있다. 그땐 자신들이 야당의 비토권으로 인해, 공수처장을 추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국민의힘은, 설사 다음에 여당이 되더라도 103석인 탓에 2022년 총선까진 공수처법 개정을 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야당의 비토권 삭제는 국민의힘이 여당이 되었을 때 매우 유리한 것이고, 공수처장 후보 추천을 용이하게 해 줄 수 있다. 달리 보면, 야당에 비토권 부여한 현재의 공수처법은 현재의 여당이 야당이 되었을 때를 고려한 안전장치로 볼 수 있는 반면, 현재의 야당이 여당이 됐을 땐 오히려 골치아픈 조항이 될 수 있다. 국민의힘이 만년 야당으로 주저앉아 있을 작정이 아니라면, 비토권을 고집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민주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해갈등으로 첨예한 현실 정치 세계에서 '만장일치'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바에야, 여야 공수(攻守)가 뒤바뀌어도 불리하지 않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공수처=삼권분립의 헌법정신 훼손하는 권력 농단?
그렇다면 공수처는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지적처럼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권력 농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헌법 제95조가 "행정 각부(部)의 설치․조직과 직무 범위는 법률로 정한다"라고 규정한 것에 비춰보면 국회가 공수처법을 제정하여 정부 기구를 설치하는 것을 헌법 위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헌법 규정에 따라 공수처는 정부조직법상 대통령 직속의 행정부 소속부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통령 직속의 감사원을 제외하면 헌법에 명시된 정부조직은 없다. 검찰청, 국가정보원, 국가보훈처, 법제처 등 '부(部)'가 아닌 청, 원, 처 역시 각각 해당 조직의 법률에 따라 구성된 행정부조직이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에 비추어볼 때 공수처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행정부 내부에서 검찰권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그 필요성을 인정해 만들려는 조직이다. 검찰이 다른 기관의 비위와 범죄행위에는 엄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검찰 내부의 권력 남용과 비리에는 눈감거나 솜방망이로 일관해 왔다는 비판이 제기돼 온 지는 오래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공수처는 권력기관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의 정신을 명시한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을 더 충실하게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힘이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공수처 설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현재 야당인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도 2016년 7월 당대표 선거에 나서면서 설치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주호영 후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검찰권이 비대한 곳이 없다. 그런 반면 검찰을 견제할 기구나 조직이 별로 없다"라면서 "공수처가 이번 기회에 정비되리라고 본다"라면서 공수처 설치를 주장했다. 여당이었을 때 가졌던 입장이 야당이 되자 180도 바뀐 것이다.
왜 이렇게 정반대로 바뀌었을까? 공수처법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원인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다. 공수처법은 무엇보다 민심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검찰총장을 비롯한 평검사들뿐 아니라 대통령과 비서실,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총리와 행정각부장․차관,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 등 3급 이상의 거의 전 고위공직자 범죄가 수사대상이다.
야당의 표현처럼 '무서운 권력기관'인 것은 맞지만, 제대로만 돌아가면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획기적으로 높여 줄 수 있다. 국민으로선 환영할 수밖에 없는 기관이다. 공수처 설치를 주도하는 정치 세력이 민심을 얻을 수밖에 없다. 여당이 공수처 설치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갔을 때 야당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여야합의로 공수처 설치가 완성되었다면, 좀 더 세밀한 법규로 정비된 기구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야당이 공수처 설치에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애초 공언했던 것처럼 '주도적으로 협조했다면', 공수처 설치에 대한 공과를 다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수처 출범 후의 최대 과제, 공수처장에 대한 견제장치는
민주당이 공수처를 출범시키면서 떠올렸을 최대의 고민거리는 '제2의 윤석열'이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다. 임기 3년의 공수처장은 공수처의 인사위원장으로서, 임기 2년의 검찰총장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고 공수처 차장과 공수처 검사(23명), 공수처 수사관(40명)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다.
정치적 독립성을 규정한 공수처법 3조는 "대통령, 대통령 비서실의 공무원은 수사처의 사무에 관하여 업무 보고나 자료 제출 요구, 지시, 의견제시, 협의, 그 밖의 직무수행에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떤 외부 간섭이나 압력도 받지 않도록 보장했다(제22조). 검찰보다 더 독립된 기구다. 누가 공수처장이 되는지에 따라서, 그가 어떤 마음을 먹는지에 따라서 수사권과 기소권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공수처장 임명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현행 공수처법 상으로 공수처장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국회의 탄핵이다. 헌법상 정부 부처의 장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탄핵할 수 있다. 하지만 고위공직자에 대한 범죄수사권을 틀어쥐고 있는 공수처장에 대한 국회의 탄핵은, 명백한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한 탄핵 사유를 첨부하기 어려운 만큼이나 현실적으로는 실행 불가능에 가깝다.
두 번째는 징계위원회를 통한 징계다. 공수처법 14조는 "처장, 차장, 수사처 검사는 탄핵이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해임, 면직, 정직, 감봉, 견책 또는 퇴직의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공수처장 징계는,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징계보다 훨씬 어렵다. 7명의 위원과 3명의 예비위원으로 구성되는 공수처 징계위원회는 공수처 내부에 설치되며 공수처 차장이 징계위원장이다. 위원은 위원장이 지명하는 수사처검사 2명과 위원장이 위촉하는 변호사, 법학 교수 등 4명, 그리고 위원장이 지명하는 수사처검사 3인이 예비위원이다. 수사처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수사처장의 직속 부하인 공수처 차장이 구성하는 징계위원으로 과연 직속 상관인 공수처장을 징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해 법조계의 한 인사는 "공수처장에 대한 징계위원장은 국무총리가 맡는 게 좋다고 본다. 총리실에 감찰부를 두고 공수처를 견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구라고 해서, 공수처장과 공수처에 대한 견제 장치를 자체 조직에 맡기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갈상돈씨는 시사평론가(정치학 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