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하다 보면 한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얼마나 무신경해질 수 있는지를 봅니다. 2003년 강제추방에 대한 심적 부담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스리랑카인 다라카씨의 장례식을 진행할 때 지나가며 냉담하게 한 마디씩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이어진 자살들에 대해 이주인권단체들이 제도 개선 동참을 호소하자, 많은 이들로부터 '살다 살다 외국 놈들 데모까지 본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한 인간의 고통을 멀리 서서 방관하는 사람들은 '내 코가 석 자'라는 말로 남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려 듭니다.
성탄을 앞두고 포천 비닐하우스에서 자던 한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설마' 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20일, 포천 지역은 낮 기온이 영하 18.6도였는데, 기숙사로 쓰던 비닐하우스는 난방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서른 살인 속헹이라는 캄보디아인 이야기입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 의하면 한파경보가 내려진 18일부터 숙소에 전기와 난방장치가 작동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전차단기가 수차례 내려가자 고인을 제외한 4인은 외부 인근 이주노동자 숙소에서 잠을 잔 반면, 고인은 혼자 냉방에 남았다고 합니다.
포천경찰서 관계자는 국과수 1차 구두 소견을 통보받았다며 "사인은 간경화로 인한 합병증으로 보이며, 동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24일 밝혔습니다. 누가 봐도 혹한 때문에 사망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경찰은 그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사시사철 따뜻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영하 20도에 가까운 냉방에서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국과수 구두 소견을 발표한 경찰은 농업이주노동자들이 기숙사로 쓰던 비닐하우스를 제대로 살피기나 했을까요? 경찰의 발표에서 남의 고통이라고 너무 쉽게 취급해 버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비닐하우스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닙니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숙소 형태는 사진과 같습니다. 작물 재배하는 하얀 비닐하우스와 달리 검은 차광막으로 덮인 비닐하우스 안에 컨테이너를 들여놓거나 조립식 패널로 방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대체로 침구 하나에 화장대 하나로 꽉 차는 크기인 방을 1인 1실로 쓰다가 동절기에는 1인 2실로 쓰기도 합니다. 남녀가 같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인데도 화장실과 샤워실은 남녀 구분 없이 같이 사용합니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딴곳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지 못할 비닐하우스 내 숙소는 농장에서 쓰는 비료, 비닐, 농약 등의 온갖 농기구 등과 함께 냉장고와 식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기 마련입니다. 잠금장치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아서 손으로 밀면 그대로 밀려서 위생은 물론이고 안전은 전혀 보장 못 하는 곳을 기숙사로 사용하는 곳이 태반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곳에 비용을 지불하며 사용해야 합니다.
고용노동부가 정한 '외국인근로자 숙식정보 제공 및 비용징수 관련 안내지침'에 따르면, 아파트, 단독주택, 연립, 다세대 주택 또는 이에 준하는 시설은 숙소만 제공하는 경우, 월 통상임금의 15%를 공제할 수 있고, 그 밖의 임시 주거시설(비닐하우스 등)의 경우 월 통상임금의 8%까지 공제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 지침은 농업 이주노동자에게 비닐하우스 등 열악한 주거시설을 제공하면서 과도한 비용을 공제하는 사례가 이주인권 단체들에 의해 누차 지적되자, 이주노동자 권익보호를 위해 근로계약서에 명시하도록 고용노동부가 2017년에 정한 것입니다. 단체들은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는 구호를 내걸고 지침 전면 폐지를 주장해 왔습니다.
이주노동자 열악한 주거환경을 외면하고 고용주 이익만 대변하며 농지법과 근로기준법 등을 위반하는 근로계약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고용노동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우스'가 집이라는 건 초등학생도 아는 영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닐하우스가 사람이 사는 집일 수 없습니다. 비닐하우스는 식물을 위한 공간이지,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은 결코 아닙니다. 외벽을 비닐로 덮어 바깥 공기가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비닐하우스는 일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겨울철에도 딸기·고추·토마토·오이·상추·깻잎·치커리 등의 채소와 화훼류를 재배할 수 있게 합니다. 식물에는 적정 온도를 보장할지 모르지만,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열악한 공간도 따로 없습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무덥습니다.
수해 이주민 80% 이주노동자였는데도 변한 게 없다
이주노동자 주거 문제는 지난 8월 수해 이주민의 80%가 비닐하우스와 그 안에 설치된 컨테이너 숙소를 이용하는 이주노동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고용노동부는 '매년 3천 개 사업장에 대해 현장점검을 실시하여 외국인근로자 고용사업장의 기숙사 시설 등에 대해 관리하고 있다'며 지난해 7월 개정된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따라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제공하는 경우에는 사용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컨테이너, 조립식 패널 등의 임시가옥은 기숙사로 허용되는 결과였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 패널로 임시건물을 만들면 기숙사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올해 1~6월 사업장 변경 사례 2만 1681건 중 기숙사 문제로 사업장 변경을 한 이주노동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은 개정된 기숙사 조항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이란 걸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동안 고용노동부와 불법건축물, 불법 용도변경 등을 담당하는 지방자치단체는 농지 가운데 설치한 농막을 빙자한 임시가옥이 기숙사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도 묵인해 왔습니다. 그 결과,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입국하고 4년 넘게 성실하게 일해 왔던 한 이주노동자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는 내년 1월이면 근로계약 만기로 귀국했다가 재입국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충분히 예견된 사고였고,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동안 비닐하우스, 조립식 패널, 컨테이너 등으로 만든 임시가옥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숙소에서 화재와 사망 사고가 숱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력 담당 부서인 고용노동부는 고용주들이 화재와 폭염과 한파 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관리 감독할 책임을 방기했습니다. 지자체 역시 이주노동자 안전에 무관심했습니다.
속헹씨 죽음이 언론에 보도되자, 고용노동부는 23일 외국인력정책위원회 회의를 통해 '농축산업 외국인근로자의 주거시설 개선을 위해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 조립식 패널 등을 숙소로 제공하는 경우엔 고용허가를 불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늑장 대응이긴 하나 고용노동부는 이주노동자 안전과 인권침해 방지를 위해 지금이라도 철저하게 결정 사항을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속헹씨 사망 사건은 사업주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숙소 문제에 안이하게 대처했던 고용노동부와 지자체의 관리 소홀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탄 전야에 '이주노동자 권익에 소홀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비닐하우스뿐 아니라 농촌의 이주노동자 임시숙소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착수하겠다고 밝힌 부분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지사는 실태조사를 토대로 이주노동자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고인의 사망 원인을 간경화라고 단정 짓고 매듭지으려고 하는 경찰과 달리 이 지사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짚고 있습니다.
"부검결과는 건강악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제대로 된 진료 기회도, 몸을 회복할 공간도 없었기에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두 존귀한 존재입니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아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라고 외치던 이주인권단체들의 주장을 공허하게 만들었던 고용노동부의 늑장 대응이 한 사람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원망스럽습니다. 이주노동자 동사 논란은 사실 기숙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외국인력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013년, 12월 9일 새벽 혜화동 로터리 다리 밑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중국동포 고 김원섭씨의 죽음이 떠오릅니다. 재외동포법 개정을 촉구하던 농성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119에 한 번, 112에 열세 번이나 전화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김원섭씨와 속헹씨의 죽음은 제도적 결함과 사회적 무관심이라는 구조적 살인이었기에 미안함을 더하게 합니다.
속헹씨 죽음을 애도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멀리서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알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