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는 다음으로 전개될 청산리대첩의 예고편이었다.
봉오동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 독립군부대는 사기충전하고 용기백배하여 본격적인 항일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다. 을미의병 이래, 국치 이후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통쾌하게 일본군을 섬멸한 최초의 전승이다.
봉오동의 패전이 일제에게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는 「봉오동전투 상보(詳報)」라는 일본군의 보고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봉오동 남방 약 3천 5백미터 높이 503(미터) 고지, 북방 약 천미터의 능선, 동방 약 천미터의 고지 능선, 상봉오동에서 높이 445미터 중턱에 통하는 정선로 북측 고지, 상봉오동 동북방 약 2천미터 높이 504 남방 고지선 및 그 서쪽 고지능선, 상봉오동 서쪽 고지로부터 사격을 받았으나 적(독립군)은 교묘히 지물(地物)을 이용하여 그 위치가 분명치 않고 탄환은 사면에서 날아와 전황불리의 상태에 빠졌다.(…)
공격 전진중 일등졸(卒) 호라이는… 복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소대장으로부터 후퇴 명령이 있음에도 전투를 계속하기에 이르러 끝내 절명하고 왼쪽 방면에서 나온 나까니시, 소토야마 양 소대와 연락이 불충분하여 피아(독립군과 일본군)의 식별이 곤란하였으나 나팔을 불어 왼쪽 고지 및 골짜기를 전진중인 양 소대와 연락을 취하고, 양쪽 고지에 척후를 보내어 주력은(패퇴로인) 비파동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주석 1)
봉오동 전투 현장의 입구(봉오 저수지 관리사무소 근처)에는 1989년 1월 18일 도문시 인민정부에서 세운 〈봉오동 반일전적비〉가 그날의 대첩을 증언하고 있다.
전적비는 길이 140cm, 너비 96cm, 높이 150cm의 화강암 2층 기단 위에 올려 놓았다. 부지 면적은 가로 720cm, 새로 350cm 이다. 좌우에 도문시의 문화재임을 알리는 현판을 중문과 한글로 각각 부착해 놓았다. (주석 2)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독립군의 동향을 예의 추적하면서 또 다른 대규모의 전투 준비를 신속히 추진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아(我) 추격대의 철수 후 독립군의 각단은 매우 민속하게 아병(我兵)과의 교전을 선전하고 있다. 도독부는『군정보신보(軍情報新報)』호외를 발행하고, 국민회도 인쇄물로서 독립군이 일병과의 교전 결과 적 150명을 죽이고 적을 선지(鮮地)로 격퇴하여 대승을 얻었다고 고취하며 독립 기세의 흥진을 착모하고 있다.
독립군 각 단체는 계속적인 교전을 예상하고 군사 행동에 대한 각단 연락의 방법 및 식량ㆍ장정 모집 등의 재전투 준비를 신속히 행하고 있는 것 같고, 장정들이 속속 독립군에 들어가고 있다.
일ㆍ지(일중) 합의에 따라 교전지 피해 조사를 위하여 지나 군대 보호하에 아 경관 수명을 2~3일 내에 피해지를 시찰시키려 하고 있다. 정보에 의하면, 앞서 교전한 적은 두만강 대안 독립군의 전부인 것 같으며, 아병의 철퇴 후에 독립군은 강안(江岸) 지대의 요점에 정찰대를 파견하여 대안 정황을 정찰중이다. (주석 3)
주석
1> 박영석, 『재만한인 독립운동사연구』, 162쪽, 일조각, 1988.
2> 김주용 「홍범도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의」, 『여천홍범도장군 순국 69주기 학술회의』, 자료집, 2012.
3> 「대정(大正) 9년 6월 15ㆍ16일 조선군사령관 제45호 전보」, 『현대사자료』28, 58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