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형제가 만주로 돌아와 재기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 미국 대통령 하딩이 1921년 동아시아ㆍ태평양문제에 관한 신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자본주의 열강의 워싱턴 회의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이 해 8월 11일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일본과 더불어 해군군축회의를 열자는 제안이었다. 하딩은 이어서 벨기에, 화란, 포르투갈, 중국 등도 참여할 것을 덧붙혔다.
이같은 제안에 따라 1922년 2월 6일부터 워싱턴에서 각국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군비축소문제, 태평양 지역문제, 극동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른바 워싱턴회의 또는 워싱턴 해군군축회의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워싱턴회의에 대한 기대는 적지 않았다. 마치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사절단을 구성하여 현지에 파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족주의 양대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워싱턴회의 외교운동에 힘있게 착수했다. 임시정부는 사절단을 구성하여 그들에게 외교활동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한국 대표단'은 이승만(단장), 서재필(부단장), 정한경(서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외에 미국인 돌프, 토마스 2인이 고문 및 특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주석 1)
한국 대표단은 미국인 고문 변호사인 돌프 변호사를 통해 미국 대표단에게 준비한 한국문제를 워싱턴회의에 제출해 줄 것과 한국대표의 연설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임시정부와 국내외의 민족운동세력은 대표단의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대표단의 외교 교섭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대규모 청원운동이 조직되었다. 한국의 종교, 사회단체 대표자와 전국 13도 지역대표 373명이 서명한 「한국인민지(致)태평양회의서」라는 청원서가 워싱턴회의 사무국에 제출되었다. 서명자들의 대표한 단체는 다양했다. 국민회의와 대동단 등 국내 비밀결사 10개, 기독교와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단체 8개, 노동공제회와 청년회연합회를 비롯한 사회단체 32개, 도합 50개였다. (주석 2)
워싱턴회의는 열강의 패권의식과 일본의 방해 등으로 한국문제는 의제에도 오르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다시 한 번 외교적인 고배와 고립에 직면하게 되고, 일제의 한국지배가 국제적으로 공인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의 잇따른 한국문제 배척에 실망과 함께 분개하고, 아울러 '서방외교'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었다.
워싱턴 회의는 한국 독립운동의 앞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려 놓았다. 그로 인해 식민지 한국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이 열강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일본의 한국지배가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의해 재승인 된 것이다. 이제 식민지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변모될 가능성은 소멸되었다. 아시아ㆍ태평양의 전후 체제는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체제는 안정화 기조에 접어들었다. 국제 정세를 업고 일거에 한국독립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의 계획은 실현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독립가능성은 영영 사라지는 듯 했다. (주석 3)
이와 같은 분위기는 일제 정보 문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 독립운동은 1920년 8월 미국 의원 관광단의 조선 방문을 한 계기로 하여 기세가 꺾이고 민심이 점차 조용하게 되었다. 다시 워싱턴회의 종료를 한 계기로 하여 민심이 안정되어, 무력 수단이나 시위운동과 같은 방법으로서 혹은 외국에 의지하기도 했으나 도저히 급속하게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주석 4)
서방측의 워싱턴회의 종결 즈음에, 그러니까 1917년 10월혁명 이후 식민지해방운동을 지원해온 러시아가 대응책을 내놓으면서 맞불 작전에 나섰다. 극동 각국의 피압박민족대회를 열 것을 제창한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한 터여서, 좌우, 중립 노선을 가리지 않고 참석을 희망하였다.
최운산은 형 최진동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대표의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주석
1> 조선총독부 경무국, 「대정11년 조선치안상황」, 고려서점 영인, 283쪽.
2> 임경석, 『대동문화연구』 제58호, 284쪽, 2005년, 성균관대학.
3> 임경석, 앞의 책, 293쪽.
4>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