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각 단체대표들이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 안에서 김규식이 '한국수석대표'로 선임되었다. 일행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은 1922년 1월 7일이었다. 2월 2일까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이 대회의 의장단에 선임되었다. 그동안의 외교활동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김규식은 개막식에서 격조 높은 연설을 하여 각국 대표단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에서 극동민족대회가 개막되던 날, 각국 대표단장은 차례로 연단에 올라 개회연설을 했다. 조선인 참석자들을 대표하여 등단한 사람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파견됨으로써 널리 이름을 떨친 40세를 갓 넘긴 우사 김규식이었다.
김규식은 미국과 러시아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과거에 워싱턴은 민주주의와 번영의 중심지였는데 비해 모스크바는 짜르의 전제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표상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고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모스크바는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석 5)
그는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를 이렇게 천명했다.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ㆍ자본주의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고자 기대한다"고 한 김규식의 이 연설은 회의장에 모인 140여 명의 대표자들과 수많은 방청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각국의 대표들이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 대회를 취재한 미국인 기자 에반즈(Ernestine Evans :가명)은 미국잡지 『아시아』 1922년 12월호에 취재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각국 대표중에 한국대표가 가장 열성적으로 보였고, 한국대표들 중에는 - 혁대를 차고 투지가 양양한 한국 군인들 시베리아의 빨치산 부대원들 - 이 많이 끼어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대회에 함께했던 최운산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참석자들은 모두 입장 전에 철저하게 몸수색을 하고 무기를 맡겨야 했다. 최진동 장군은 허리에, 가슴에, 다리에……. 여러 자루의 권총을 지니고 있었는데 모두 내어놓지 않겠다고 버티셨고 옥신각신하다가 입장 시간이 늦어졌다. 결국 최운산 장군의 설득으로 권총을 모두 맡기고 대회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회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최진동 장군은 큰소리로 외쳤다.
"아직 내가 들어가지 않았다. 멈추라!"
대회장인 레닌이 단상에서 내려와 웃으며 최진동 장군을 자리로 안내했다. (최운산「연보」)
한국인 대표들은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러시아 정부 요인들을 면담하였다. 이들은 한국독립운동가들을 따뜻하게 환영하였고 독립운동의 지원도 약속하였다. 대일 빨치산 투쟁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 홍범도와 최진동은 특별히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선물받기도 했다. 최운산이 여운형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주석
5> 앞의 책, 31~3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