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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날! 그날의 인천은 어땠을까?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일찍부터 "여기서 농악소리가 요란이 들리었다"고 한다. 오전에는,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정부수립 경축식이 열렸다.

오후에는, 커다란 농악판이 펼쳐졌다고 하는데 장소는 어디였을까? 당시 인천 발 신문기사에 소상히 적혀있다. "하오에는 농악경연대회 여흥을 신흥, 송림 양 광장에서 개최했다"고 기록했다. 정부 수립의 뜻 깊은 날, 인천에선 신흥초등학교(중구)와 송림초등학교(동구)의 운동장에서 커다란 농악판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농악(農樂)은 그 뜻으로 따지자면, 농촌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이다. 하지만 실제 농악은 농촌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뜻깊은 날이면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 농악이다.

일제는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을 통해서 당시 조선인의 민족말살 정책을 폈다지만, 농악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구심점이 되는 농악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자신들이 더 큰 화를 입을 걸로 여긴 것으로 짐작된다. 오히려 농악은 조선총독부의 연구대상 중의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에 유명했던 농악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악이다. 강원도의 농악도 알려졌지만, 상대적으로 인천이 포함된 경기도의 농악은 덜 유명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경기도의 농악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필름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영화 <수업료>를 보면, 당시 학교에선 일본어를 쓰고, 집에선 조선어(우리말)를 쓰는 상황이 그려진다. 영화의 후반에 농악이 잠시 나온다. 영화의 무대는 수원이고, 영화 속 지명에 인천과 평택이 등장하는데, 그 당시의 경기농악을 알 수 있다.

대성농악단, 경기농악으로 자리매김하다
 
 인천 국악을 꽃피웠던 대성목재 '대성농악단' 멤버들. 이들로 인해 인천국악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인천 국악을 꽃피웠던 대성목재 '대성농악단' 멤버들. 이들로 인해 인천국악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 윤중강
 
그렇다면 인천농악은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당시는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있기 때문에 경기농악이라고 했는데, 점차 '경기농악=인천농악'으로 자리매김됐다. 그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대성농악단'의 창단이다. 1962년 4월 1일이었다.

대성목재는 회사 내에 농악부, 밴드부, 복싱부를 두었다. 예술인들과 체육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해 육성했다. 인천 출신의 문화행정가 김승국 이사장(노원문화재단)은 "한국 최초의 '메세나'(기업들이 문화예술을 지원하며 사회에 공헌하는 활동 - 편집자 말) 기업은 인천의 '대성목재'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당시 인천은 경기도에 속해있었는데, 전국적으로 '경기농악'이 알려지게 된 것은 대성목재에 대성농악단이 생겼기에 가능했다. 농악이 체계적으로 계승되면서, 인천농악(경기농악)을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다.

일찍이 농악으로 알려진 곳은 전라도의 좌도농악과 우도농악, 경상남도의 삼천포농악이다. 인천은 대성목재 농악단의 창단을 계기로 체계적인 전수와 공연을 펼쳤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농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그 해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였다. 창단된 해, 대성목재 농악단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했다.
 
 한국 최초의 메세나 기업은 대성목재였다. 대성목재가 지원하고 키운 대성농악단은 제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초의 메세나 기업은 대성목재였다. 대성목재가 지원하고 키운 대성농악단은 제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 윤중강
 
당시 추석 연휴를 맞아서 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1962년 9월 12일, 민속예술경연대회는 중앙청(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스코리아 진선미를 필두로 전국의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면서, 두 군데로 갈렸다.

한 쪽은 덕수궁, 또 한 쪽은 창덕궁을 향했다. 전국의 타 지역 농악팀이 덕수궁으로 간 것에 반해, 경기농악(대성농악단)은 창덕궁에서 전남민요, 경남오광대 등 다른 가무악희(歌舞樂戱)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나절 공연을 했다.

대성목재 농악부 초기 멤버로는 채상의 명인 박산억과 함께, 김용래(평택농악)와 임광식(수원농악)이다. 대성농악단에 큰 영향을 끼친 김용래는 훗날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가 됐고, 임광식은 농악단을 거쳐서 국립전통예술학교에서 평생 농악지도를 했다. 그는 '수원두레'의 복원에 앞장을 서고 있다.

그 시절, 대성농악단은 인천의 곳곳을 다니면서 연습을 하고, 공연을 했다. 대성목재를 비롯해서 인천공설운동장, 수봉공원, 학교 운동장에서 공연을 했다. 지금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1960년대로 당시 인천시청(현, 인천 중구청) 바로 앞에서 농악을 펼치는 사진이고, 많은 이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대성농악단'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당시 대성농악단에서 활동했던 청소년은 이제 우리나라 농악분야의 큰 어른이 됐는데, 대표적인 분인 바로 지운하와 진명환이다. 아쉽게도 대성농악단은 1970년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지운하는 대성농악단을 거쳐서 워커힐 국악단에 합류를 하게 되고, 이후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희부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된다.

1960년대 '낭자농악단', 요즘 걸그룹 인기 못지않아

대성농악단은 원래 남자 청소년 중심이었지만, 점차 여성 멤버를 영입을 했다. '여성농악'이 있었다. 원래 농악은 남성 중심이었는데, 1960년대의 여성농악의 멤버들은 당시 '걸그룹'과 같은 인기를 얻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중심이 된 여성농악을 '낭자농악단'이라고 했는데, 낭자는 당시 여성에 대한 존칭이었다.

여성농악단은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서울 등에서 공연을 하며 인기를 얻었는데, 대성농악단은 '아리랑여성농악단'의 하순자(은자), 신영자, 김옥화 등 6명이 영입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대성농악단 출신의 지운하와 진명환은 사물놀이의 김덕수 명인과 함께 팀을 조직하고, 여기에 하순자, 김옥화 등이 합류해 일본에서 '춘향전'과 같은 대작에 출연하기도 했다.
 
 인천국악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경아대. 경아대는 제10대 인천시장을 지낸 유승원 시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건립됐고, 건축에 사용된 목재는 대성목재에서 지원했다.
인천국악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경아대. 경아대는 제10대 인천시장을 지낸 유승원 시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건립됐고, 건축에 사용된 목재는 대성목재에서 지원했다. ⓒ 사진 유호중
 
인천이 농악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대성농악단이 창단됐기에 가능했고, 또한 인천시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적극적인 후원의 주인공은 제 10대 시장(1961년 5월~1963년 2월)을 지낸 유승원(柳承源, 1921~1984)이다. 1962년은 인천국악의 새로운 출발이 된 해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유승원 인천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62년 국악회관 추진위원회가 발족됐고, 유승원 시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대성목재를 비롯한 인천의 여러 기업이 국악을 후원하도록 유도했다.

1963년 율목동에 세워진 '인천국악원'에 해당하는 '경아대'도 유승원 시장이 없었다면 불가했다. 그는 인천의 기업을 돌아다니면서, 경아대라는 아름다운 한옥을 건축하는 데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경아대는 바로 인천기역의 물질적 협조로 건립이 가능했는데, 경아대를 짓는 데 필요한 한옥의 나무는 대성목재에서 협조해 가능했다.

인천 출신의 유승원 시장은 국악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 인천의 역사가 기록해야 할 분이다. 1960년대의 유 시장의 대를 이어서, 인천시가 더욱더 전통예술에 관심을 두길 바란다.

* 필자 윤중강 약력
- 인천출생
- 서울대학교 국악과 졸업
- 일본 국립도쿄예술대학원 졸업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인천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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