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물건을 판다는 것
연휴 내내 묵은 짐을 정리했다. 낯선 운동기구, 포장 그대로인 사은품, 유행이 지난 옷과 가방, 걸기엔 애매한 액자와 거울, 손수 만든 쿠션과 도자기, 유품이 된 애견용품... 없어져도 모를, 버리기는 미안한, 그저 그런 물건들이 어깨를 맞대고 누워 처분을 기다린다. 마당에 실려 나온 창백한 물건들의 능선 위로 햇살이 스민다. 갈 곳 없는 그들에게 출구가 되어준 것은 지역 기반 온라인 벼룩시장(flea market), '당근마켓'이다.
버릴 것을 고를 때는 '절대적 무가치'가 기준이 되지만, 팔 것을 고를 때는 '상대적 무가치'가 기준이 된다. '필요하진 않지만 너무 멀쩡해서' 벽장 속으로 들어갔던 것들이 기어 나온다. '내겐 필요 없지만 누군가는 필요로 할' 물건들이 판매 목록에 오른다. 그리고 내가 가진 대부분의 물건이 실은 그 범주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집 안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원할 구체적 개인들을 상상한다. 상상력이 풍성해질수록 곁을 구성하는 물건들의 목록은 단출해진다.
책상 귀퉁이에 뽀얀 먼지를 입은 연필깎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새 주인을 그려보며 편지를 띄운다. 사흘, 혹은 열흘, 연필깎이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어느 오후, 그녀로부터 답신이 온다. 시들어가던 하나의 물건이 누군가의 손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모습을 본다.
떠나는 물건이 살짝 웃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중고 판매라는 행위를 통해 무가치함이 가치 있음으로 변하는 순간을 본다. 골칫거리가 지폐 몇 장으로 변신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를 맞이하는 누군가의 설렌 표정에 더 놀라게 된다. 교환가치를 넘어서는 사용가치가 생겨나기를, 그 품에서 쓰임새 많은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헌 물건을 산다는 것
각 잡힌 포장을 겹겹이 두른 새 물건이 가진 위엄이 있다. 빳빳한 감촉, 흐트러짐 없는 각도, 채 가시지 않은 원재료의 향과 그 전부를 아우르는 윤기. 우리는 그 아우라에 기꺼이 가격을 지불한다.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성품(readymade)이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착각도 함께 구매한다.
그래서일까, 종종 하루 만에 카리스마를 잃어버린 그것을 보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큰맘 먹고 산 물건이 실망스러울 때, 우리가 지불한 무형의 가치들은 미련이 되고, 그대로 상처가 된다. 그 잉여가치가 서서히 상각될 때까지, 어쩌지도 못하고 그러안고 있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다.
빈티지(vintage)는 '낡고 오래된 것', 고물(古物)은 옛날 물건, 골동품(骨董品, antique)은 '오래되었거나 희귀한 옛 물품'을 뜻한다. 모두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때로는 그 시간 덕에 오히려 가치를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해 중고(中古)는 '이미 사용하였거나 오래됨'을 뜻하는 단어로, 새 것만 아니라면 반드시 오래될 것을 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한 오래되지 않은 물건, 새 것같은 물건이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새 것은 아니지만 새 것같을 것. 중고품이 갖추어야 할 어려운 미덕이지만, 중고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대개 관대한 편이다.
윤기 대신 생활 주름이 있고, 작은 흠집이나 잔기스가 눈에 띈다. 감가상각을 마치고 수수하게 앉은 모습이 어쩐지 내 모습 같기도 하다. 벌거벗은 물건 그 자체와 조우할 때면 우리가 조금은 평등한 느낌이 든다. 그런 물건은 권위적이지 않아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중고로 들인 전집을 아이가 다 읽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게 된다. 사람 위에 물건이 군림하지 않는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사람과 사람
낯선 이와 약속을 하고, 그 생김새와 매무새를 상상하며 서 있다. 왠지 머뭇거리는 이가 있다면, 눈인사를 건네도 좋다. 수줍게 말을 섞고, 손에 든 것을 주고받고, 배웅을 한다. 클릭 한 번이면 문 앞에 와 있는 택배 상자와 달리, 물건에 덤으로 따라오는 만남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래도 물건을 매개로 한 만남은 담백하다. 소박한 물건을 내어놓은 나만큼이나 소박한 사람일 거라는 믿음으로, 용기 내 약속 장소에 서 본다. 인상이 좋다고 말해주는 아주머니도 있고, 좋은 물건을 왜 파냐고 묻는 아저씨도 있고, 아내 심부름을 나왔다는 젊은 아빠도 있다. 이 생에서 만날 리 없던 사람들과 계획에 없던 인연을 짓는다.
오늘 처음 보는 낯이언정 마냥 설지만은 않은 것은, 그가 우리 동네 사람이기 때문이고, 내가 그의 체온을 알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가 무의미한 세상이라 여겨왔는데,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범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심리적 거리를 좁혀준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의 평가가 차곡차곡 쌓여 평판이 되고, 닉네임을 바꾼다 해도 수정할 수 없는 그의 정체성이 된다.
그 지점에서 어렴풋이 현대판 마을공동체의 실루엣을 본다. 익명성의 뒤에 숨어 약속을 깨거나 무례하게 구는 이는 이 마을에서 살아가기 어렵다. 동네인증과 매너온도라는, 섬세하게 설계된 시스템은 이용자로 하여금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
낯선 이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를 쓰고,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들으며, 뉴스로 보던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세상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뢰할 수 있는 이웃이 많은 사회. 남의 나라 이야기 같던 그 사회로 가는 초석 하나를, 보잘것 없는 동네 벼룩시장이 놓고 있다.
헌 물건으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
잠깐 쓰고 버려지던 값비싼 유모차. 요즘엔 그 유모차 한 대가 동네를 돌고 돌며 온 마을 아기들을 키워 낸다. 자원을 재활용하며 줄어드는 탄소 배출량을, 당근마켓에서는 매달 '우리가 함께 심은 나무 수'로 집계해서 공지한다. 이 달에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6481그루의 소나무를 함께 심었다. 무료나눔의 날을 정해 대가 없는 나눔을 장려하고, 따뜻한 사연을 공유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하루에 올릴 수 있는 게시글의 수를 제한해 지나친 상업화를 막고, 마스크를 너무 비싸게 팔지 못하도록 폭리 행위를 제한한다. 간간이 사각지대가 발생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이라기에는 규제가 많은 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유시장을 비인간적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당근마켓은 유물론적 기반 위에서 사회의 작은 변화를 꿈꾼다. 당근마켓이 가지는 따뜻함의 정체는 여기에 있다.
요즘 당근마켓에는 자기가 만든 눈사람을 자랑하는 사진도 올라오고, 푸르스름한 감자를 먹어도 되는지 묻는 사진도 올라온다. 배앓이 하니 아이는 먹이지 말라는 걱정스런 답글이 달리고, 더 멋지게 만든 눈사람 사진이 경쟁하듯 달린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함께 찾아 달라는 부탁도 있고, 동네 할머니께 통기타를 나눔 하면서 코드 잡는 법을 가르쳐 드렸다는 사연도 있다.
소소한 물건을 사고팔기만 한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진입장벽이 낮은 원초적 형태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이웃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고, 지구를 보호하는 기쁨을 깨닫고, 자신을 더 의미 있게 쓰는 법을 조금씩 알아 간다.
이 시대에 사람들이 이 동네 벼룩시장에 자꾸만 접속하는 이유는, 단지 물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지붕 아래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느낌. 더 크고 공적인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당근마켓이 주는 진정한 위안도, 당근마켓이 나아가야 할 길도,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