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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길동전> 표지.
<홍길동전> 표지.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부안 유배지에서 『홍길동전』을 짓고 있을 때 왜국(일본)의 동정을 명나라에 알리는 진주사로 발령되었다가 이틀 만에 갈렸다. 그의 관계 복귀의 반대자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이듬해(1613년) 심우영 등 일곱 서얼의 옥사사건이 있었다. 하마터면 이 사건에 연루될 뻔했으나 용케 빠졌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심우영ㆍ서양갑 등이 연루되었다. 모두 서자 출신들이다. 

임진왜란 후 선조는 어비(御批)를 내려서 서얼들의 차별을 풀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실제에 들어서는 더욱 잔학한 모멸을 더할 뿐이요 서류 등용의 길은 열리지 아니하니 박응서(朴應犀)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환로를 열어달라고 빌었으나 허하지 아니하므로 분개하여 굴(窟)을 여강(驪江)에 짓고 일실(一室)에 동거하여 양식을 저적(貯積)하여 타일 피병(避兵)의 자(資)에 쓰고자 하며 혹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하고 혹은 도원결의(桃園結義)라고 하여 동지를 합하여 왕래 교유하면서 허균ㆍ이재영(李再榮)ㆍ이사호(李士浩) 같이 이에 동정하여 주는 이는 이에 가담케 하였다.(『일사기문』, 『연려실기술』)

이들은 소양강변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신세를 개탄하면서 자칭 죽림칠현이라 하였다. 주동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7서지옥'의 주역들이다.

 박응서(朴應犀): 사암(思庵)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목사 익(益)의 서자
 심우영(深友英): 전(銓)의 서자, 허균의 처삼촌
 이경준(李耕俊): 병사 제신(濟臣)의 서자
 박치인(朴致仁): 유량(有良)의 서자
 박치의(朴致義): 충간(忠侃)의 서자
 김경손(金慶孫): 사계(沙溪)의 서제(庶弟). (주석 1)


이들은 광해 신해(辛亥: 1611)에 염상(鹽商)을 해주에서 경영하며 그후 부호 이승숭(李承崇)의 집을 표략(剽掠)하며 영남에 가서 은상(銀商)을 쳐죽이고 은 6,7백 냥을 빼앗으며, 병량(兵糧)을 준비하고 회뢰(賄賂)로써 조정에 있는 문무관을 매수하여 장차 임금을 들어버리려고 하였다. 『(광해군일기)』

이 기록에 따르면 서자들이 작당하여 임금을 쫓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당쟁이 심하던 시절이라 '실록'의 기술을 온전히 믿기는 어려운 정황이었다.

대체 이 행적은 『홍길동전』과 틀림이 없으며 이로 보아 '홍전(洪傳)'은 허균ㆍ서양갑 등의 자서전이요, 홍길동은 허균의 이상적 인물일 것이다. 사림이 능히 작품으로써 그 작가를 율(律)할 수 있다면 허균은 감상적 문인이요 호사자(好事者)인 동시에 불의를 보면 의분에 넘치는 감격성(感激性) 깊은 지사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뢰한이다. 활빈당의 투사요, 서민을 위하여 만장(萬丈)의 기염을 토하였다. 남양 홍씨의 족보에 홍일동(洪逸童)의 제(弟) 길동으로 적혀 있고 연대도 상당(相當)하나 그 이상 더 고찰할 수 없다. (주석 2)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죽림칠현'은 물론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허균도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었으나 물증이 없어서 끝내 엮이지 않았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쪽으로 처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처신을 둘러싸고 가혹한 평가가 따랐다.

"행실이 가볍고 망령되어 물의를 일으켜 버림받은 지 오래되었다."(『광해군일기』)

허균에게는 시시때때로 위험이 닥쳐왔다. 그러나 서류들이 감싸주었기 때문에 허균이 끼어든 사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의 신변에서 위험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허균은 글방 동문인 이이첨에게 벼슬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칠서지옥 전에는 허균이 이이첨을 찾는 일도 없었거니와 벼슬을 부탁한 적은 더구나 없었다. 이 구명책으로 말미암아 허균의 생애는 뒷사람이 올리고 깎는 표폄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사람됨을 평가할 때에 늘 이것으로 저울질하게 되었다.

그때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들 그는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그때의 선비들도 그를 덜 나무랐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흔히 보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그를 평가하는 구실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허균은 이이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광해의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석 3)


주석
1> 김태준, 저, 정해렴 편역, 『김태준 문학사론 선집』, 72쪽, 현대실학사, 1997.
2> 앞과 같음.
3> 이이화, 앞의 책, 73~7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허균평전#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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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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