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는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억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이 있다. 이 세 가지가 하나 된 집에 사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현재의 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고(故) 정기용 건축가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의 집'에 산다는 것은 교육과 일자리를 좇아 수도권으로 상경한 지방 청년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남은 건,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인가'이다.
하지만, 대다수 지방 출신 청년의 주거 형태인 원룸이나 기숙사는 꿈속의 집과 거리가 멀다. 1년 혹은 2년을 주기로 바뀌는 주거공간에 많은 애정을 쏟기도 힘들 테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출신 수도권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또한, 그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지난 3월 28일~30일, 전화 인터뷰 등을 통해 지방 출신 수도권 청년 세 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실에서 라꾸라꾸 침대에 롱패딩 덮고 잤어요"
맹근영씨(남, 23)는 대전이 고향이다. 2018년 고려대에 입학하면서부터 기숙사에 살았다. 문제는 3학년이 되면서 발생했다. 3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원칙적으로 잔여석이 발생했을 때만 기숙사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 교내 신문사 기자이자, 현 학군단 소속인 맹씨는 여러 방면으로 해결책을 강구했다.
"살 곳이 없으니까, 학군단에서 학교 측에다 얘기해서 3, 4학년에게도 기숙사 TO를 마련해줬어요. 그래도 2월 한 달 동안은 신문사 활동을 해야 하니까 아파트 셰어하우스 형태의 신문사 숙소에 들어갔죠."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기숙사 개방이 미뤄지면서 상황이 난감해졌다. 3월부터 신문사 숙소를 희망했던 다른 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가가 서울이었던 해당 기자는 맹씨의 사정을 양해해줬다. 덕분에 맹씨는 신문사 숙소에 4월까지 거주하다가, 5월에 비로소 기숙사로 옮길 수 있었다.
맹씨는 "3년간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그곳을 집으로 느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학기마다 짐을 풀고 챙기기를 반복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많은 학생이 본가로 내려가는 방학이 되면, 학교가 1개 동에 학생들을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숙사 같은 경우에는 방학 기간 마지막 1, 2주 정도는 무조건 방을 비우게 해요. 청소 때문에요. 2학년 방학 때는 신문사 활동 때문에 대전에 내려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짐을 신문사 편집실에 옮겨놓고, 거기서 라꾸라꾸 침대 펼쳐서 롱패딩 덮고 자고 그랬죠."
맹씨는 3개월 전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비용 면에서는 기숙사가 낫지만, 언제든 원할 때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친구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을 느낀다.
"집이라는 공간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저는 잠깐이지만 교내 신문사 숙소 생활할 때가 좋았어요. 편한 사람들이랑 같이 밥 해 먹고 배달 시켜 먹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을 서울에 온 이후로 처음 할 수 있었죠. 지금 자취방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는 학교랑 가깝고 교통 편리하고, 주방이랑 자는 곳이 분리된 공간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
"저에게 집은 부모님이 사는 곳입니다"
부산에서 생활했던 김아무개씨(남, 27)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가족이 다 함께 경기도 화성시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일터가 화성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의 대학에서 화성 집까지는 왕복 3시간 정도였다. 그나마도 버스 시간을 잘 맞췄을 때의 얘기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 아니어서 버스 배차 간격은 30분에 달했다. 김씨는 괴로운 통학생활을 2학년 1학기에서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전역 이후 시작된 자취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샤워실 배수구는 종종 머리카락에 막혔고, 여름에는 빨래를 해도 옷에서 냄새가 나기도 했다. 또, 좁은 공간에 온종일 있는 건 '집돌이'인 김씨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거실이 있으면 방에 있다가 거실에 나가서 쉬다가 하면서 집돌이가 될 수 있는데, 원룸에 하루종일 있지는 못하겠더라고요. PC방도 가고, 친구들이랑 더 자주 만나고 하면서, 밖에 있는 시간을 늘렸어요."
김씨의 자취 생활은 지난해 초, 공무원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막을 내렸다. 화성 집으로 돌아와 수험 생활을 시작하면서 김씨는 집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공부하면서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때 집의 의미를 깨달았죠. 집에서 엄마 밥 먹고, 방에서 푹 자고 이런 것의 소중함을 알았어요. 고생하던 시기에 집에 있으니까 충전이 빨리빨리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취를 할 때도 '집'이라고 하면 화성에 있는 집을 떠올렸어요. 위치나 지역보다는 '엄마, 아빠가 살고 있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지난해 10월, 약 1년 1개월의 수험기간 끝에 김씨는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나름 주거 계획도 세웠다. 공무원 임대주택에서 6년 정도 생활한 뒤, 모은 돈에 대출을 더해 집을 산다는 것이다. 여러 조건을 차치한다면, 김씨는 한옥에서 살겠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예쁘게 꾸민 한옥을 본적이 있어요. 강아지를 키울 수 있는 적당한 마당이 딸린 한옥, 그런 곳에서 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친한 관계가 있어야 '집'이 되는 것 같아요"
부산 출신인 백송현씨(남, 27)는 대학 때부터 친환경 코스메틱 기업 '러쉬' 입사를 꿈꿨다. 서울살이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지난해 중반, 몇 번의 시도 끝에 서울의 한 '러쉬' 매장에 영업직 파트타임으로 입사했다. 파트타임부터 경력을 쌓아 본사에 입사할 계획도 염두에 뒀다. 집은 오피스텔로 서울대입구역에 구했다.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한 번화가라는 점에 끌렸다.
"저는 서울이라는 곳을 '도심 속 한가운데' 같은 이미지로 상상했어요. 다른 싼 곳도 많았는데, 첫 1년은 번화가이자 어딜 가도 가까운 교통 중심지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부모님 품을 떠나 시작한 자취생활에 백씨는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좁은 방 한 칸에서 지내는 생활에 점점 염증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풍경이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이어지는 건 힘든 일이었다. 쉬는 날에도 편하게 불러낼 동네친구가 없다는 점도 크게 다가왔다.
"나가고 싶어도 만날 친구가 없어서 혼자 자전거를 타기도 해요. '집'은 안락해야 하고, 주변에 친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 지금 사는 곳을 온전한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아요."
백송현씨가 꿈꾸는 집은 세대 수가 많은 아파트다. 이유가 궁금했다. 왜 세대 수가 많아야 할까?
"제가 직접 살아보니까, 세대 수 많은 아파트에서 살면 사람 사는 기분이 들어요. 주민 불편에 대해서 목소리 내주는 반상회장도 있고, 종종 중고물품 장터도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인사도 하잖아요. 근데 오피스텔에서는 모르는 남자가 인사하면 이상하거든요."
그렇지만, 서울에서 세대 수가 많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백씨는 "돈을 모아서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에 15평짜리 집을 사는 게 현실적 목표"라고 덧붙였다.
각기 다른 사연의 세 청년은 서울생활을 하는 동안 지냈던 곳이 "'집'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집이 '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역설적이다. "현재의 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정기용 건축가의 말이 묵직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