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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친하게 지내던 선배의 말은 내가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젊을 때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꽤 친하게 지내던 선배의 말은 내가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젊을 때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 pixabay

"주말에 뭐 했어?" 어느 평범한 월요일에 한 회사 선배가 물었다. 마침 기분 좋은 주말을 보내고 온 터라 "집에서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컬러링 북을 색칠했는데 그 날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까지 좋아서 너무 좋더라고요"라고 해맑게 대답했다. 나보다 나이가 열두 살 정도 많았던 그 선배는 "너 언제까지 주말에 혼자 색칠 공부하는 게 재밌을 것 같니? 40살 넘어서도 재밌을까?"라며 내게 일침을 날렸다.

꽤 친하게 지내던 선배의 말은 내가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젊을 때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선배의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제대로 명중했다. 잠자고 있던 불안감의 씨앗에 싹이 텄고, 그 후로 한동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괜히 바쁘고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주말이면 소개팅에 박차를 가했다. 소개팅이란 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성공률이 0%다. 이제 막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된 상대방과 짧은 만남 속에서, 서로 비슷한 정도의 호감과 신뢰를 느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체험하는 시간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아무래도 내가 찾는 인연은 이렇게 긴급하게 구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선배의 아주 따끔했던 말 때문에 진짜로 뭐라도 하다 보니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고, 내 나름대로 현실과 나 사이의 타협점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올해 들어 '예전에 비해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더는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거칠게 줄여서 말하자면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타입이다. 식사 메뉴를 고를 때 나를 본다면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오해할 만큼 '결정 장애'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큰 결정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반드시 해야 한다면 비교적 예측가능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쪽으로 선택하는 편이다.

이런 나에게 익숙하고 살기 좋은 군산을 떠나 전주로 이사 가겠다는 결정 역시 쉽지 않았다. 혼자 살 집을 구하는 일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아파트 구입은 커녕 전세도 공포였기에 일단 월세를 구했다. 작은 임대 아파트지만 아파트라서 모든 가전 가구를 직접 사들여야 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혼자 사는 동안 잠깐 쓰다가 버린다고 생각하면서 중고제품이나 중소기업의 저렴한 제품으로 고를지 아니면 오래 쓸 요량으로 브랜드 네임이 있는 비싼 제품을 고를지 결정하는 일은 지금 당장 내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알아보기조차 싫었다. 덕분에 이사한 후 일주일 넘게 냉장고가 없어서 아이스박스에 음식을 넣어두고, 빨래는 한쪽에 쌓아두고 사는 믿고 싶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더는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몇 가지 가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오래 쓸 각오로 값이 좀 나가는 제품들로 빠르게 구매해나갔다. 정신없이 혼자서 집을 구하고 이삿짐센터와 계약하고, 크고 작은 집안 살림들을 들이는 나를 지켜보면서 오히려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고 어떤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선택지든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무언가를 선택해나가야 한다는 현실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결정 당시의 내가 원하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자유로써 큰 의미가 있었다. 더불어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따라오는 단점이 아닌 '장점'과 '기회'에 집중하고 잘 즐길 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거실 한켠에 마련해놓은 서재 모습
거실 한켠에 마련해놓은 서재 모습 ⓒ 전원
 
내 취향과 손길이 담긴 물건들로 채워진 혼자만의 공간에서 사는 일은 정말 행복하다. 우리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꼭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편안한 기분이 든다. 이사 오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가족들도 훌륭한 하우스 메이트였다고 생각했지만, 혼자 살면서 진정한 고요와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다.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어떤 분이 SNS에 혼자 사는 사람의 혼잣말 1-2-3단계에 대해 재밌는 글을 올린 것을 봤었는데 나 또한 자기와의 대화 실력이 날로 늘고 있다. 집에 혼자 있다가 문득 오늘 저지른 실수가 생각나거나 내 처지가 불행하게 느껴질 때에는 얼른 위로의 말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어."
"그렇게 잘 안 해도 되고, 그냥 대충 살아도 돼."
"내가 알아. 오늘도 정말 애썼어."


다른 친구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해줬을 말들이다.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때만 효과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직접 나에게 소리 내어 말해주면 마음 저 깊은 곳까지 슬그머니 위로가 된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작은 집이 가진 마법인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내 마음 속을 보여주고 싶은 친구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면서 초대할 사람 명단과 일정을 혼자 짜보고 수줍게 연락해보는 일도 요즘에 찾은 즐거움 중 하나다. 집에서 이 책 저 책 읽다가 펼친 채로 뒤집어서 부엌이고 거실이고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책을 두곤 하는데, 이것도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면 꾸지람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상상해보면서 이런 소소한 자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하려고 한다.

어떤 선택이든 영원히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한 선택을 막연하게 불안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면서 지내지도 않는다.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과감하게 선택하고 누리는 일에 최대한 집중한다. 이 모든 것은 실패하더라도 집안 살림을 일단 사서 써 봐야 다음엔 더 편리하고 좋은 것을 잘 고를 수 있다는 것을 해봐서 알게 된 덕분이다. 잘못 산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30대 여자#독립#결정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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