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한민국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하며 국적·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국내 거주하는 모든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모든 아동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정한 기본적 권리들을 보장받고 있을까요?
지난 4월 19일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이민조사과가 발표한 '장기체류 외국인 아동에게 조건부 체류자격 부여' 제도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주아동, 정확한 통계가 없다
이 제도는 국내에서 출생한 후 15년 이상 국내에 계속 체류하면서 대한민국 중‧고교 교육과정을 받고 있거나 고교를 졸업한 외국인 아동을 대상으로 학교 재학, 법 위반 여부 등 일정한 심사를 거쳐 학업 등을 위한 체류자격을 부여합니다. 법무부는 이 제도를 시행하는 이유 중 하나로 체류 자격 때문에 미등록 이주아동의 학습권 보장이 되지 않는 현실은 1991년 대한민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 내용과 정신에 배치될 수 있다는 지적을 수용했다고 밝혔습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중 학습권 관련 부분만 살펴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2조 제1항. 아동 또는 그의 부모나 후견인의 (중략) 사회적 출신, 재산, 무능력,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에 관계없이 (중략) 이 협약에 규정된 권리를 존중하고, 각 아동에게 보장하여야 한다.
제28조 제1항. 당사국은 아동의 교육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며, 점진적으로 그리고 기회균등의 기초 위에서 이 권리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월보에 따르면 2021년 3월 말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2백만 명이고, 그중 미등록자는 39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미등록이주아동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족 동반을 허락하지 않는 대한민국 외국인력정책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동들이 통계에 잡힐 가능성을 배제해버립니다. 매해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를 하는 통계청 자료 역시 15세 이상 국내 상주인구를 기준으로 하므로 어떤 통계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출입국 통계월보, 교육부 학생 통계, 국내 주재 각국 대사관에 등록된 국내 출생 아동, 부모를 따라 입국했다가 체류 기간을 넘긴 아동, 대한의사협회에 집계돼 있는 미등록 이주아동 등을 참고할 수 있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이런 자료들을 수집하여 통계를 내기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2~3만 명 정도로 관련 단체들이 추산할 뿐입니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아이들
미등록, 또 다른 말로 불법체류자인 이주아동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자마자 존재 자체가 불법이 돼버립니다. 아동이지만 당연히 누려야 할 생존권, 학습권, 보건 의료권, 문화 여가를 즐길 권리, 사회권 등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려서부터 장기체류하고 있는 아동과 그 부모들은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주아동 지원 활동을 하는 단체들도 똑같은 주장을 합니다. 제발 대한민국에 살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서 말입니다.
법무부 역시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배경 중 하나로 "대한민국에서 출생하여 장기간 거주하며 공교육까지 이수한 외국인 아동은 언어・문화적으로 사실상 우리 국민에 준하는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으니 그런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법무부 발표를 듣고 기뻐하는 마리아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 내 친구들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한국말밖에 하지 못하는데 왜 필리핀에 가야 해?"
마리아가 오랜 미등록 생활에 지쳐 귀국하려고 했을 때 아들이 한 말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울고불고하는 아들의 마음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이라는 마리아는 아들에게 더 어렸을 때부터 모국에 대해 가르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발표 전에 출입국 단속에 걸렸다가 보증금 1200만 원을 내고 보호일시해제된 마리아는 그간 사연을 적어 출입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꿈을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일하러 왔고 사장님께 인정도 받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제 아들은 외모는 필리핀 사람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필리핀에 간 적도 없고, 필리핀 사람들과 어울린 적도 없어 필리핀 말도, 음식도 먹을 줄 모릅니다. 한국말을 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평범한 아이입니다. 아들이 자라가면서 제 비자는 만료됐고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적 정체성 때문에 아동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반외국인 정서를 가진 국민을 설득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18년 청주지방법원은 청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이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내린 강제퇴거명령 취소를 명하며 판결문에 이렇게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출생하여 현재까지 사실상 오직 대한민국만을 그 지역적·사회적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을 무작정 다른 나라로 나가라고 내쫓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생존권을 보장하여야 할 문명국가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
(...) 대한민국에서 초·중·고 정규교과과정을 모두 이수한 원고를 강제로 내쫓는 것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경제적·인적 피해를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년의 정규교육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성장한 원고를 이제 와서 내보내는 것은 그에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을 감안할 때 큰 손실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정부에 촉구하면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말하는 권리보다 대한민국에 얼마만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방점을 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작 중요한 아동의 기본권적 권리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아동의 권리는 그 정체성과 관계없이 '아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장받아야 합니다. 아동은 단순한 보호대상이 아니라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생존권, 보호권, 발달권, 참여권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아동은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모든 형태의 위험, 차별, 학대와 방임, 차별, 과도한 노동, 약물과 성폭력 등 아동에게 유해한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교육을 받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여가를 즐기며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에 의견을 말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 내용과 정신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아동의 경우 합법체류로 봐야 함이 타당합니다.
마리아가 한국에 더 있고자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아들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있는 아들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갈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여느 한국 부모와 다를 바 없습니다.
어린이날에 부모의 마음으로 '유엔아동권리협약' 네 가지 원칙을 함께 살펴봤으면 합니다.
무차별의 원칙 : 모든 아동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인종이든,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모두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아동 최선 이익의 원칙 :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결정할 때에는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생존과 발달의 원칙 : 아동은 특별히 생존과 발달을 위해 다양한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아동 의견 존중의 원칙 : 아동은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적절한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갖고,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에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의견을 존중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