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
1991년 5월 10일 오후 6시 30분경 전남대 대강당 화장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온몸에 불이 붙은 청년이 대강당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노태우 정권 타도'와 '노동해방'을 외쳤고 이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끄고 급히 그를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도착할 당시 청년은 전신에 화상을 입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청년이 누구인지는 한참 있다 경찰에 의해 밝혀졌다. 밤늦게 그의 가족과 연락이 됐고, 다음날 새벽 아버지와 형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월 12일 0시 1분, 형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말았다. 이름은 윤용하, 스물두 살의 작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열네 살 때부터 노동을 했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
윤용하 열사는 1969년 전남 순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초등학교를 5학년 때 그만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1983년부터 중국집 배달을 시작했다.
이후 열사는 여러 곳에서 노동일을 하다 1989년부터 '성남피혁'이란 회사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대학 출신의 활동가를 만나 사회 현실과 노동자의 참된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1990년 봄에 '민주직장인청년연합'(아래 민직청)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직청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청년운동을 벌여나가던 단체였다. 회원 수는 150여 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학생운동 출신들이 많았다. 당시 민직청은 회원이 되려면 정회원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열사도 정회원 교육을 마치고 문화분과 소속인 풍물패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민직청 시절 사람들은 그가 모임에도 적극적이었고, 뭐든지 열심히 배우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풍물패 반장이었던 박영주씨의 기억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내게 장구를 배우는 용하의 모습입니다. 빨리 배우지는 못했어요. 몇 번을 알려줘야 했고 그마저도 자주 까먹었죠.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는 대단했어요. 이 기억만큼은 또렷이 나네요."
민직청 풍물패와 시사토론모임에 적극 참여
민직청 회원 중 열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우상수씨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풍물패를 하면서 시사분과의 시사토론모임에도 가입해 활동했죠. 사회문제나 정치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어요. 수련회에도 빠지지 않았고, 집회가 있으면 열심히 참석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실제로 열사는 1990년 8월 범민족대회와 남북학생회담 촉구 시위에 참여했다가 대학로에서 경찰에 맞아 온몸에 상처를 입고 고려대 부속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을 만큼 실천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1990년 11월경 대전에 사시던 아버지가 척추협착증으로 하반신을 제대로 못 쓸 만큼 건강이 악화돼 고민이 많았다. 그때 우상수씨는 열사에게 "지금 너한테 중요한 일은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대전으로 내려갈 것을 권했다. 결국 열사는 민직청 활동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내려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돌보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분신 전날 장미꽃 들고 박승희에게 문병 와
열사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든 것은 강경대 학생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뒤이어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학생들의 분신과 죽음이 잇따르자 열사는 슬퍼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기설 열사의 죽음에 대해 분신 배후조종 운운하며 책임을 운동권에게 돌리는 정권에 대해 열사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그가 남긴, 반쯤 불타버린 유서에서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현 정부는 김기설 열사의 분신의 책임을 이른바 운동권 세력에게 돌리려 한다. 누가 분신을 배후조종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그렇다. 바로 살인을 만행하는 현 정부 노태우,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총칼 휘둘러 온 현 정부뿐이다. 민주화를 외쳐대는 우리 청년학우여,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대학생, 노동자, 농민 아니 우리의 4천만 아니 7천만 겨레를 죽였다. 우리는 자본가들에게 끝까지 싸우리라. 노태우는 국민 앞에 사과하고 퇴진하라. 강경대를 살려내라."(윤용하 열사의 유서 중에서)
5월 8일 열사는 대전을 떠나 범국민 규탄대회에 맞춰 광주에 왔다. 5월 9일에는 분신한 박승희가 투병 중인 전남대병원에 문병을 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배은심 어머니(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저녁에 웬 청년이 승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 장미꽃을 들고 왔다가 면회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서 있다 돌아갔다"고 한다.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망월동에 넋으로 오다
윤용하 열사의 장례는 5월 16일 거행됐다. 장례 주체는 '전국청년단체협의회'(전청대협)과 '광주지역노동자협의회'(광노협)이 맡았고, 장례 명칭은 '민주청년 고 윤용하 열사 민주노동자장'으로 정했다. 청년노동자였던 열사의 짧은 생애가 담긴 명칭이었다. 장례위원장은 오종렬 광주전남대책회의 공동의장이, 집행위원장은 이철우 목사가 맡았다.
5월 16일 오후 1시 30분 발인과 영결식을 마치고 도청 앞 노제를 지내기 위해 전남대병원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지금의 동구청 앞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소나기처럼 쏟아내며 도청 앞 노제를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맞서며 대치와 공방을 거듭했다.
결국 장례위원회는 노동청 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열사가 분신한 전남대를 거쳐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열사를 안장했다. 이때가 17일 새벽, 1박 2일의 기나긴 장례였다. 평소 열사는 망월동 묘역을 꼭 참배하고 싶어했다. 장례식에 참가한 열사의 형이 말한 것처럼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망월동에 끝내 넋으로 오고만' 것이다.
장례가 끝난 뒤 열사의 형인 윤용범씨는 동생을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슬픔에 젖어 나약하지 않으렵니다. 좌절에 빠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렵니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동생이 그토록 염원했던 노동해방 세상을 열어가는 투쟁의 한길에 우뚝 서겠습니다. 그리하여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한마디의 사과는커녕 불순 배후세력을 운운하면서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저 간악한 사악의 화신, 독재의 무리들에게 오늘의 이 아픔과 고통, 슬픔과 분노까지 모두 모아 남김없이 되돌려 주렵니다. 그것만이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조국의 영원한 아들로 다시 부활시키는 길이라 굳게 믿습니다."
불우한 환경을 집요하게 캐묻던 기자들
윤용하 열사가 사경을 헤매던 때는 병실 앞에, 그리고 숨을 거둔 뒤에는 영안실 앞에 기자들이 진을 쳤다. 그들은 열사의 형과 대책위 관계자들에게 열사의 가족관계,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을 집요하게 캐물으며 분신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했다. 경찰 쪽에서 열사가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를 형에게 확인하는 일도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뻔했다. 열사의 분신이 정권을 규탄하고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투쟁이 아니라 불우한 처지를 비관해 벌인 행동으로 몰아가기 위해서였다. 열사의 유서와 숨을 거두기 직전 남겼던 "노동해방을 위해 분신을 생각했다"는 말은 취재대상도 관심사항도 아니었다. 공안당국의 '분신 배후'와 '불우한 처지 비관'이라는 주장을 거들고 짜 맞추기에 급급했던 언론의 실상을 명백히 드러내주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윤용하 열사를 비롯해 김기설, 이정순, 정상순 열사 등 노동자, 민중 열사들에게서 제대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투쟁과 삶에서 보여준 헌신성이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확고한 민중성을 지녔다. 사회에 대한 인식은 학생운동 출신들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그들이 남긴 유서의 구절들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왜 투쟁해야 하는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보여주고 있다.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 열망한 청년노동자
민직청 시절 윤용하 열사의 풍물패 선배였던 박영주씨에 따르면, 열사는 <가야 하네>라는 민중가요를 즐겨 불렀다. 민직청 동료들도 망월동 묘역에 올 때면 열사의 영전에 담배 한 개비를 올리고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가야 하네 우리 함께 어깨 걸고
억압과 착취 모두 깨부수러
투쟁으로 우리 하나되어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끝없는 노동으로
절망하고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손에 손잡고 벅찬 새날 위하여
물결이 되고 성난 파도되어
투쟁으로 우리 하나되어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으로
30년 전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을 열망했던 청년노동자 윤용하. 그의 외침은 '절망하고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우리들 곁에 영원히 살아 있다.
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안영민은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현재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과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