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 헌시를 바치다
1921년 김두봉(金枓奉)은 박재혁이 순국하자 그를 위한 창가(唱歌)를 지었다. 일본어 번역문이 남아있지만 정확한 내용을 해독하기 어렵다. 추후 정확한 번역이 있기를 기대하며, 추정되는 내용으로 여기에 남긴다.
(一國男兒) : 한 나라의 사나이
견문을 갖추어 놓으니
가슴에 [독립의] 피가 끓는다
그 눈물을 머금고 견디며
뿌릴 곳을 찿으려고
십 년 동안 찾아다녔는데
여기가 [바로 그] 장소다.
2. 곽경임[곽재기] 등이 발[목]을 잡혔다
개새끼의 꼴 보고 (부산경찰서를 가리킨다)
여기가 장소다
왜놈이 어떻게 감지하겠냐
나에게 장려의 편지를 쓰리라
하시모토를 없애겠다[?]
[피어난] 무지개를 보리라[?]
3. 황색아(黄色児) 흑색아(黒色児) (신라 황청랑을 가리킨다)
안중근과 강우규
우리들 범상한 벗들아
그대들 묘지에서 우노라
핏줄이 같은 동포 여러분
눈물이 없느냐
울어라 울어라
1940년 9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11월 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지정하였고 그 명단을 밝혔다. 박재혁은 안중근, 이재명, 이봉창, 윤봉길 등 12명과 같이 '경술 전후의 의사'로 지정되었다.
1946년 3월 1일 오후 3시부터 박재혁 의사의 공적을 추모하고자 부산진 좌천정 부산진공동묘지의 박의사 묘 앞에서 추모제를 하였다. 참석한 사람은 박재혁의 가족과 친구이자 동지들, 그리고 부산시민들이었다. 모친 이치수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우리 조선 사람도 이제야 나라를 찾은 기쁨에 넘쳐 있을 때 제(박 의사) 혼자 이런 기쁨을 보지 못한 것은 원통합니다마는 지하에 있는 내 자식도 우리 조선이 해방된 것을 알면 기뻐할 것입니다."
최천택은 박재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재혁과 나와는 소학교와 상업학교의 동창생이었을 뿐 아니라 어린아이때부터 고락을 같이하였던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그의 성격은 강렬하였고, 정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몹시 장난을 좋아하였습니다마는 언제나 순정을 버리지 않고 모든 일에 몰두하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택은 박재혁의 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박재혁의 행사는 누구보다 가장 깨끗하였다. 첫째 목숨을 걸고 적전(敵前)에 접근하여 결사(決死) 실천(實踐)한 것. 둘째 당초부터 공범자가 없도록 처리하고 단독 결행한 점. 셋째 적전 사형을 거절하고 아사(餓死)한 점"이다.
추모제에는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가지고 부산에 온 김원봉도 참가하였다. 참배 후에 김원봉. 오택, 김인태, 왕치덕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최천택이 같이 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추모제에 참석한 김원봉, 오택, 최천택, 김인태, 장지원 등이 '박재혁지묘(朴載赫之墓)'를 뽑아내고 '박재혁의사지묘(朴載赫義士之墓)'라는 목비를 세웠다.
해방 후 오택은 정공단 경내에 박재혁 비를 세우기를 부탁하였다. 1948년 10월 오택, 최진택[최천택], 유유진과 함께 비석을 세웠다. 그 비는 개교 70주년을 맞이하여 부산진초등학교 교정으로 1981년 5월 8일에 옮겼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있다.
"기미독립운동 후 백(百) 이론(理論)보다 일(一) 행동(行動)이 귀함을 말하고 단신으로 상해에서 폭탄을 가져와 일제의 침략 관문인 부산의 경찰서를 폭격(爆擊)하였다. 때는 경신년 9월 14일이다…. 옥중에서 신음하다가 익년(翌年) 5월 12일에 절식(絶食) 자진(自盡)하니 공의 나이 27세라. 그 충렬(忠烈)을 표하기 위해서 이 비(碑)를 세우노라. 단기 4281년 무자(戊子) 10월"
1951년 12월 정부에서는 순국선열에 보은하기 위해 134명에게 유가족 생활비를 부조(扶助)하였는데 박재혁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1962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208명을 포상하였다. 당시 상훈 심의위원회에서는 『조선독립혈사』 등 12권의 심의자료를 토대로 국시(國是, 국가이념) 위배(違背), 정치적 과오, 납북, 변절,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 자 등 6개 제외 규정을 준용하여 독립유공자를 엄선하였다. 유공자 208명 중 작고한 분이 188명, 생존한 분이 20명이었다. 박재혁 의사는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을 받았다. 1963년 법률 개정으로 이 훈장은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으로, 1971년 법률 개정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69년 부산시는 좌천동 공동묘지를 주택단지로 조성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유족들에게 이장 통지서를 보냈지만 유족들의 연고지를 알 수 없었다. 당시는 모친 이치수가 사망한 이후였다. 공사 업자가 일방적으로 묘지를 파헤치기 직전이었다. 이장 마감 이틀을 남기고 서울에서 내려온 양자 박기동과 박재혁 의사의 여동생 박명진의 진정에 의하여 1969년 4월 7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에 유골이 안치되고 그해 10월 20일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 76번에 안장되었다. 현충원 "순국선열 박재혁의 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순결한 민족을 무참히 짓밟은 침략자 일제를 향해 피맺힌 분노를 던지다. 죽음조차도 그들의 손끝 하나를 허락지 않아 스물일곱의 끓는 피가 두 눈 부릅뜨고 자진하여 스러져 가다. 어두운 벼랑의 역사에 오직 한 길로 맑았던 의사는 이곳 민족의 무릎 위에 고이 잠들다."
1998년 5월 12일 삼일 동지회의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와 부산상고 동창회, 유족회(회장 김갑경, 박명진의 아들)가 중심이 되어 부산광역시 건립, 롯데그룹 제작, 조각가 한인성(부산대 미술학과)의 '박재혁 동상'을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준공하였다. 추모제는 2020년까지 (사)3・1 동지회 부설 박재혁기념사업회에서 매년 5월 봉행하였다, 2020년 개성고등학교 총동창회는 본격적인 추모 사업을 하기 위해 '사단법인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그동안 기념사업을 위해 고군분투해왔던 박재혁 의사의 이손녀 김경은의 노력으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을 맞이하여 옛 부산경찰서 터(현재 중구 동광동 2가 10의 5번지)에 박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를 기리는 표지판을, 동구 범일동 가구거리 공영주차장 앞에 생가터 표지판을 부산중구청과 부산동구청에서 세웠다.
2021년 5월 11일 오후 2시 부산어린이대공원 박재혁 동상 앞에서 '박재혁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기념식'이 (사)삼일동지회 중앙회와 (사)박재혁기념사업회에서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행사가 있었다. 순국 10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박재혁의 순국일인 5월 11일에 맞춰 행사를 하였고, 행사에 박재혁의 증손자 박준서와 박명진의 친손녀 김경은 유족이 참석하여 자리를 더욱 뜻있게 하였다.
이제까지 잘못된 박재혁 의사를 약력을 수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 183번지에서 박희선과 이치수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1907년 부산육영학교(釜山育英學校) 학동(學童)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박재혁, 최천택, 김영주, 백용수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1년 3월 사립부산진보통학교(부산육영학교, 현 부산진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4월 1일 박재혁(18세)은 최천택(17세), 오택(16세)과 함께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1914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재학하면서 학교 친구와 정공단 친구와 함께 '동국역사 배포 사건', '구세단' 활동을 하여 고초를 겪었다.
∙1915년 3월 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제4회, 현 부산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상해의 중화국청년회관(中華國靑年會館)에 입학하여 어학을 공부했다.
∙1917년 6월 싱가포르로 건너간 후 무역상을 하며 상해, 싱가포르와 부산을 오가며 인삼무역 등을 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장 김원봉과 접촉한 후 귀국하여 8월 초까지 머물다 중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거사 자금과 폭탄을 지원받았다.
∙1920년 9월 6일 의거를 위해 부산으로 돌아온 후 오택의 집에 폭탄을 숨기고 최천택, 김영주와 함께 거사를 도모하며 부산 동래 온천장, 해운대, 범어사 등지에 머물었다.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부산경찰서로 들어가서 폭탄을 던져 건물을 파손하고 하시모토 서장은 부당을 입었고, 박재혁 자신도 오른쪽 무릎에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1920년 9월 14일 오재영(오택), 촤천택, 김영주 등 정공단 친구들이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1920년 10월 5일 부산경찰서 투탄 관련 보도통제가 해제되었고, 박재혁의 친구들은 불기소 석방되었다.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대구감옥에 단식 투쟁 중 27세로 옥중에서 아사(餓死) 순국하였다.
∙1921년 5월 14일 부산 좌천동 부산진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부산 유지들이 정공단에 "의사박재혁비"를 세웠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4월 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 10월 20일 국립 서울 현충원에 이장(애국지사-76)하였다.
∙1981년 5월 8일 정공단의 박재혁의 비를 부산진초등학교로 옮겼다.
∙1998년 5월 12일 부산어린이대공원에 박재혁 의사 동상을 세웠다.
박재혁 의사 순국 100주년을 추념(追念)하며
보라, 여기 아름다운 청년이 있다
한번을 살더라도 제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청년이 있다
살아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한
의열단원 박재혁 아름다운 청년이 있다
대한제국 시절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며
일제 침략의 교두보 부산에서
왜적에 맞서 싸운 부산진성 사람의 호국 정신을 늘 다짐했던
오택, 최천택, 김영주, 김인태, 김병태, 왕치덕…
좌천동 정공단 친구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나라가 빚에 쪼들려 망해가자
어린 정공단의 친구들은 짚신을 아껴가며 국채보상운동을 하였고
을사년, 나라의 자주권이 상실되자
이날을 목놓아 울며
정공단에서 나라를 되찾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하였고
경술년,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부산상업학교 친구, 정공단 친구들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널리 알려야 한다며
동국역사 배포 사건을 일으켰고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해야 한다며
구세단을 조직하여 먼 훗날을 도모하였다
누가 청춘의 시절
멋지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고 싶었겠는가?
태평양 건너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망국의 한을 품고
중국 상해와 싱가포르를 드나들며
인삼 장사를 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탐색하다가
마침내 1920년 3월 김원봉을 만나
정의를 열렬히 실현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민족해방 투쟁에 헌신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독립투쟁을 한다는 것은
가족의 안위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모친과 어린 누이동생은 늘 눈에 밟히고 밟혔다
하지만, 강도 일제의 잔혹함은 갈수록 더해가고
백성들의 앓는 소리 하늘을 찌르고
이제 절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자주독립을 이룰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를 폭파하여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자
하지만 시시각각 조여오는 적들의 감시
마침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심하였다
아, 청춘의 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박재혁 의사는 인간 폭탄이 되어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동경이라 불리는 부산 한복판 경찰서에 홀로 들어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중국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폭탄 한 개를 들고 조선옷 두루마기를 입고
담담하게 당당하게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박재혁 의사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침내,
부산경찰서에 폭탄이 터졌다
초량왜관 시절부터 통감부 그리고 총독부 시절까지
적들의 부산 통치 심장부에 폭탄이 터졌다
건물이 파손되어 먼지가 무지개처럼 피었다
폭탄의 파편은 하시모토 서장을 향해 날아갔다
적들은 우왕좌왕 혼비백산하였다
아. 박재혁 의사도 폭탄을 피할 수 없었다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정공단의 친구들을 보호하겠다
의열단의 조직을 누설하지 하지 않겠다
단독으로 행하였다
나의 배후는 조선총독부다
박재혁은 적들의 잔혹한 고문에도 절대 발설하지 않았다
오택, 최천택, 김영주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적들은 박재혁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적들은 사형수 박재혁에게 모멸감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박재혁은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치욕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대한의 아들로서 당당하게 죽고 싶었다
27세 꽃다운 나이
아름다운 청년 박재혁은
1921년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일제에 죽임 당하기 보다
단식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였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민족해방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자주 독립운동 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가
죽음과 죽임이 산을 쌓고 쌓아
마침내 해방을, 광복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민족해방전선에서 이름 없이 죽어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립투쟁 전선에서 기록도 없이 죽어갔는가
오늘, 우리는
단 한 줄의 기록으로 남는 사람들을
단지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다짐하여야 한다
박재혁,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를 한 자랑스러운 의열단원
보라, 여기 죽음에 당당히 맞서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청년, 의열단원 박재혁을 보라
오로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한 사람이다
자랑스러운 부산의 청년,
치욕스러운 죽음을 넘어 자진 순국한
아름다운 청년, 의열단원 박재혁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