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생명 주일(5월 2일)을 앞두고 발표한 담화문을 통해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아이를 평생 찾지 말라"
2014년, 주디 덴티 주연의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가 떠올랐다. 임신을 알게 된 가족들이 주인공 필로미나를 로스크레아 수녀원으로 보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수녀원에서 아이를 낳은 어린소녀들은 세탁공장에서 12시간에 달하는 노동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단 30분의 시간을 통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면회할 수 있었다.
당시 미혼모들이 낳은 아이들을 세계 각국에 돈을 받고 수출하는 정책을 펼친 아일랜드는 "아이를 평생 찾지 않는다"는 각서에 사인하고서야 입양을 보냈다. 그야말로 인권유린의 현장에 어린 미혼모들의 '속죄'는 다름 아닌 혼인하지 않고 낳은 아이와 헤어지는 것이었다.
영화 속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필로미나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였을까? 현재 다양한 가족을 구성하며 서로 의존할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내세우는 보편적 가치는 거의 똑같이 작동되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언급한 염수정 추기경과 16일 이철 기독교대한감리회 회장의 인터뷰는 참으로 닮아 있다.
"차별을 막는다고 가족 형태를 무너뜨릴까 봐 걱정인 거죠. 차별을 하지말자에서 그쳐야 하는데, 기존의 가족 형태가 깨질까 봐 염려하는 것이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이미 차별을 막는 법은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죠."
종교에서 주장하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깨질까 봐 염려되는 '가족 형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004년 제정된 건강가정기본법에서 명시된 대로 '혼인‧혈연‧입양'을 통한 가족만을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로 보는 것은 아닐까?
17세 청소년부모는 아이를 키우고 싶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가구 형태는 부부+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가족이 점점 감소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2000년 전까지 50%를 약간 상회했던 정상가족은 2019년 30% 이하로 떨어졌다. 오히려 1인 가구가 30%를 상회하고 한부모, 조손 가구, 비혈연 가구 형태 등이 뒤를 이었다.
1977년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가족의 부양자인 남편과 전업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된 현대 핵가족은 16%에 불과했다. 가족 형태의 변화는 이미 농촌의 확대가족이 폐기되면서부터 시작했다.
초기 산업자본주의 핵가족 등장, 후기 독점자본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줄곧 '가족의 형태'는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듯, 여성가족부는 지난 4월,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통해 "가족의 개인화, 다양화, 계층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며 다양한 가족에 대한 정책수립계획을 발표했다.
다양한 가족 유형 중엔 청소년부모도 존재했다. 지난 4일에 방송된 MBC <PD수첩> '인천 모텔 아기-위기의 청소년부모' 편에서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한 17세 청소년부모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했다.
"엄청 많은 시설에 다 연락해 봤어요. 보육원, 자립원, 미혼모시설 다 연락을 해 봤는데 보육원은 아기 입양처를 연결시켜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곳도 있었고, 미혼모 시설은 아기 아빠랑 떨어져야 되니까... 일단 미성년자는 집을 계약해주는 곳이 잘 없어요."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는 빈곤도 세습된다. 돌봄 없는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가족 내 잔혹사'는 인천 미추홀구 화재 사건인 '라면 끓이던 형제 날벼락, 코로나 시대의 비극'으로, '강북구 한파 속 내복 아이' 사건으로, '여수 냉장고 두 살 배기 쌍둥이 시신 방치사건'과 '인천서 8살 여아 숨진 채 발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지할 가족과 이웃이 없는 청소년부모에게 수많은 저출산 정책과 늘어가는 복지 예산은 '빛 좋은 개살구' 였다. 시설 중심적 한부모 정책 속에서 아이를 키울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종교는 고통받는 타자들에게 청소년부모를 비롯한 자격 없는 시민들의 가족 구성을 법제도 안의 '가족'으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혜택을 받아야 하는 수혜자로만 대할 것인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손 내민 예수의 가르침은 정녕 낙인화 된 복지정책을 만들어 시설에 수용하는 것뿐이었을까?
비정상 가족은 없다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처럼 가족으로 인정되지 못한 혼외출산 당사자들이 수녀원에서 강제노역하고, 아이와 분리되는 정책은 구별이 아닌 '차별'이었고 포용 없는 '배제'였다.
착취와 약탈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본주의 21세기 버전인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대세인 지금 이 세상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살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여성은 남성과,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과 그리고 병든 이들은 건강한 이들과 구별되지만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성찰할수록 '정체성'과 '차이성' 안에서 배제 없는 포용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누구까지 '환대'할 수 있는가?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환대를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로 구별한다. 무조건적 환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의 집에 이방인 내지 타자를 있는 그대로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의 이름조차도 묻지 말 것을 필수적으로 내세운다.
정치와 법이 난무하지만,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종교는 중요하다. 보편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시대에 고통받는 타자를 향한 배제 없는 포용 정책일 것이다.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가족 유형에 따른 차별 없는 '환대'의 공간에서는 가족에 대한 정의(定議)는 정의(正義)로운 정의(定議)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함께 할 가족은 필요하며 비정상 가족은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한부모연합 사무국장입니다.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