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2020년 8월 정년퇴직한 교사 김혜영이 지난 4월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 먼저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약속의 말들>이라는 책을 냈다. 그 아들은 2016년 10월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하며 드라마 제작 현장의 장시간 노동과 폭언, 비정규직 해고 등의 부당한 업무를 강요받으며, 동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해 끝내 제 삶을 던진 故이한빛 피디이다.
저자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상실감과 탈진의 상태에서, 그와의 마지막 기억을 하나라도 더 붙들기 위해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시간을 글로 엮어 책으로 냈다고 한다. 이한빛 피디와 부모에 관련된 소식을 방송과 신문기사 등을 통해 종종 관심 있게 지켜보던 나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안도감이 들었다.
2018년 4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홈페이지 '빛이 머문 시간'에 연재된 60여 편의 한빛 이야기에서, 저자는 어떻게든 아들과의 추억들을 가슴 한편에 묻으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그녀의 마음은 다시 제자리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다고 한빛이 돌아와?"
그런데 책을 내다니! '한빛을 만나고 부르고 다시 일어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하려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가운 마음에도 나는 한동안 책을 열어보지 못했다. 책을 펼치면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혹은 마주칠까 내내 두려웠던 못다 한 슬픔과 아픔이 큰 파도처럼 몰려올 것만 같아 미리 단단히 심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런데 첫 장을 열자마자 나는 한빛보다 먼저 '나'를 만났다.
그해 4월, 한빛이 세월호 리본을 어머니에게 달아주며 말했다.
"기억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예요. 기억도 의식을 갖추면 용기가 생겨요."
(중략)
한빛은 리본을 다는 극히 작은 의식이 사람들 가슴속에 있는 평화의 씨앗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작은 씨앗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고 했다.
- 「들어가며」 9~10쪽
세월호 이름을 들으면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이다. '지금에야 무얼 한다고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저자의 고백처럼 '나도 남들에게 떳떳한 사람이 아닌데 의로운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부끄러웠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며 이런 나도, 고마움과 미안함을 빚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미래의 나의 아이들에게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후원과 댓글, 집회와 추모제에 참여한 수많은 보통의 청년들과 노동자들, 익명의 시민들이 보낸 응원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힘과 희망을 얻었다는 감사들이 여러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이름 없는 풀씨
2019년 9월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공감실천 100일 프로젝트' 참여로 한빛과 인연을 맺은 나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 소액의 후원을 하고 있다(이제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씨앗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읽는 것도, 우리의 아들딸, 친구, 형제, 부모가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 외롭게 겪고 있을 슬픔과 아픔을 함께 공유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실천이다.
나의 막연한 두려움과 달리,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하고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희망과 용기로 안내했다.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유와 권리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의 나의 존재는, 인간의 존엄을 외치며 귀한 생명 불사른 한빛과 같은 평범한 의인들과 긴 세월 그 고통 함께한 유가족들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을 버티어준 덕분이다.
"모든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자 사회적인 죽음이다"라고 정신건강의학과전문의 정혜신(<당신이옳다> 공감실천 프로젝트 오프라인 모임)은 말한다. 또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역사'라는 이야기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언제나 선인이 이길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고 이만교 작가(개인 SNS)는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수많은 위로의 말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지점들은, '그런데 한빛이 여기에 없다'고 아들의 부재를 끝도 없이 반복해서 확인해야만 겨우 가혹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지나간 아름다운 기억들과 아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몇 번이고 힘들게 몸을 일으키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주저앉고 발아래 세상이 무너지고 마는, 그 끝 모르는 부모의 아픔을 누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한빛의 어머니, 김혜영은 아들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외침과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풀처럼 눕고 풀처럼 울었다가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름 없는 풀씨 하나로 같이 눕고 같이 일어나는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