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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쑹칭린 묘역에 있는 신규식 선생 묘비. 1993년 이장 전까지 선생은 중국 땅에서 70년 넘게 잠들어 있었다.
쑹칭린 묘역에 있는 신규식 선생 묘비. 1993년 이장 전까지 선생은 중국 땅에서 70년 넘게 잠들어 있었다. ⓒ 김종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한 이래 가장 극심한 시련기를 맞고 있을 때, 그 주춧돌을 놓았고 임시의정원과 정부에서 요직 그리고 중국 호법정부와 가교 역할을 해온 예관의 서거는 독립운동 진영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기관지 『독립신문』의 부음 기사이다.

신군(申君)은 금년 43세로, 한국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7세에 능히 문장과 시를 지어 신동의 칭이 있었다. 어릴 때 이미 애국과 변란 평정의 책임감을 품고 있었고, 22세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학문을 쌓아 군대에서 복무하였다. 
 
한국이 오랑캐에 의해 보호국이 된 후부터 지방군대와 암암리에 연락하여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음독자살하려 했으나 사람들에 의해 구원되어 죽지 않았다. 이로 인한 눈의 이상으로 흘겨보는 눈이 되어 스스로 예관(晲觀)이라 호를 지었다.
 
한국 망국 후 여러 차례 광복을 도모하여 위난을 겪었다. 신해혁명 때 중국에 와서 손(孫)ㆍ황(黃)과 투합해서 공헌하여 매우 중시되었다. 이후 중국에 정착하였으나 여전히 시시로 독립선포를 획책하였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설치하였다. 
 
신군은 사법총장에 선임되었고, 후에 다시 총리대신대리와 외교를 겸하여 분망하게 총관하다가 심신이 모두 과로하여 뇌질환이 왔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신군은 한문에 정통하고 서예에 능통해서 중국인 중에도 절친한 친구가 많았다. 집안이 청빈하여 사재(私財)를 쌓지 않았고, 아들 하나를 남겼는데 겨우 10세이다. 본국의 동지들이 상해에 많지 않아 사망 후 장례를 갖출 수가 없었는데, 듣건대 머지않아 모처의 외국인묘지에 안장할 것이라 한다. (주석 7)

 
 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 .
 
상하이의 중국 시사주간지 『동명(東明)』은 다음과 같은 부음 기사를 실었다. 

 찬 밤에 달이 푸른 단풍나무를 비추는구나
 사람의 일이 이에 이르니 하늘의 도를 어찌 논하겠는가
 이제 절망이로다. 지성 일관으로 살아오신 분
 상하이에서 영원히 돌아가신 예관 신선생. (주석 8)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던 방에서 바라본 진독수 선생 집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던 방에서 바라본 진독수 선생 집 ⓒ 김종훈
 
중국의 대표적인 신문 『중화신보(中華新報)』는 「신규식군 빈장기(殯葬記)」에서 장례의 모습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작고한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대리총리 신규식선생을 어제 안장하기로 한 것은 이미 앞선 보도에서 본 바 이에 상세히 보도하면, 빈례(殯禮)는 어제 낮에 거행되었고 영구차는 2시 반에 애인리(愛人里) 상가에서 출발하였는데 영구차 줄을 잡고 걷는 사람이 200여 명이나 되었다. 그중 중국인은 은여려(殷汝驪)ㆍ황복생(黃復生) 등 30여 명이 있었는데 모두 신군과 오랜 교분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만장 등은 수백 폭으로 모두 중국 친우가 기증한 영구차의 인솔로 장빈로(長濱路)를 경유하여 복개삼로(福開森路)를 돌아 홍교로(虹橋路)로 나와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도착하였다. 연도는 조용하고 엄숙하였으며 마차도 소리가 없었다. 초가을의 들 풍경은 서로 어울려 낙엽은 온 천지에 가득하고 백설은 하늘에서 날려 사람들의 슬픔을 더하기에 족했다.
 
공묘에 도착하여 영구를 식장에 안치하고 한국교포 수인이 이어서 연설하니, 가족들은 흐느끼고 조문객들은 슬퍼하여 기자도 애석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중국 내빈에 신군과 교분이 오랜 왕군(王君)이 있었는데 역시 연설을 하고 약 1분 동안 돌며 묵도례(黙禱禮)를 하고, 마침내 한국교포들이 관을 들고 묘지로 인도해 갔다. 신군의 처와 딸이 묘혈에 엎드려 울며 머리를 들지 못하니 보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장례를 마쳤을 때는 이미 모색(暮色)이 창연하였다. (주석 9)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의 선구자 예관 신규식선생은 43세의 젊은 나이에 이역에서 조국광복에 모든 것을 바치는 간난신고의 생을 접었다. 25일간의 단식으로 초췌해진 육신은 한줌 재로 변해 상하이 프랑스조계 홍교의 만국공묘에 안치되었다. 

선생은 오랜 세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험한 길을 무릅쓰고 유랑했으니 일생을 두고 고난을 겪으신 때문에, 원래 크고 멀쑥한 신체가 더욱 야위고 후리후리해졌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어린시절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으셨고 언제나 몸가짐에 있어 끝내 군인의 규율과 단정함을 간직해 지키셨으니, 일종의 장엄하고도 위대한 기상이 떠돌았다. 이러한 장엄한 기상은 원래 그 절반을 천성으로 타고 나신 것이며, 또한 절반은 후천적으로 수양(修養)과 극기(克己)로써 얻으신 것이라 하겠다.
 
낮에는 종일토록 선생께서 한 번이라도 자리에 누우시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여름철에 아무리 날씨가 찌는 듯 더워도 선생께서는 윗옷을 벗는 일이 없으셨고, 실내에 계실 때에도 언제나 장삼(長衫)을 입으셨고, 땀이 흘러 등이 흠뻑 젖어도 역시 태연하셨다. (주석 10)


사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리고 조국이 광복이 되고도 48년이 지난 1993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방치되었던 신규식 선생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 박은식ㆍ노백린ㆍ김인전ㆍ안태국 선생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애국지사 신규식 선생 묘에서 바라본 친일파들 무덤. 사진 속 좌측 상단에 소나무 사이 비어있는 언덕이 제2장군 묘역이다.
애국지사 신규식 선생 묘에서 바라본 친일파들 무덤. 사진 속 좌측 상단에 소나무 사이 비어있는 언덕이 제2장군 묘역이다. ⓒ 김종훈
 
김영삼 대통령은 신규식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립묘지 안장식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풍찬노숙하면서 나라를 찾으려 하셨고, 그 과정에서 쓰러져 이국의 땅에 묻혔으나 생전의 한결같은 소망은 독립된 본국에 돌아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제나마 조국에 유해를 모시게 되었으니 저 세상에서도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추모하였다.

대한민국은 1962년 예관 신규식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주석
7> 『독립신문』, 1922년 9월 30일.
8> 『동명』, 1922년 10월 1일.
9> 『중화신보』, 1922년 10월 4일.
10> 민필호, 앞의 책, 29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신규식#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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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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