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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그리움과 특별한 감회로 마음속에 자리 잡은 꽃이나 나무가 있나요?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온 산마다 하얗게 피었던 '밤꽃'이 제게는 그런 꽃입니다.

옛 고향 집에 아름드리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다섯 그루였다가 차츰 한 그루씩 잘라내 한 그루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년기 내내 다섯 그루가 자랐고, 그 주변을 맴돌며 놀곤 했습니다. 게다가 앞집의 커다란 밤나무가 마루에서도 보이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밤꽃이 피기 시작하면 한동안 밤꽃 향기가 진동했겠지요.

그런데 아마도 해마다 하얗게 피었을 밤꽃이나 향기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담장을 따라 쏟아져 내린 밤꽃을 보고 벌레인 줄 알고 소스라쳐 놀랐으나 나중에는 예쁜 것들을 골라 빠끔살이(소꿉놀이) 하던 것과, 밤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던 가을밤, 이른 새벽 밤을 주워 구워 먹던 재미 등 관련 기억들이 뚜렷한데도 말이지요. 이런 밤꽃이 특별한 꽃이 된 것은 첫째가 유월에 태어나면서입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던 그 하얀 밤꽃 

결혼을 앞두고 일어난 교통사고가 채 수습되기도 전에 일어난 화재로 신혼은 정신없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자동차 관련 사업을 했는데, 교통사고로 물건을 시중에 다 풀지 못한 상태로 화재까지 덮치다 보니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악재가 이어지다 보니 부정적인 생각만 들곤 했습니다. 엄청난 빚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이런 와중 아이가 왔습니다. 연이어 겪은 악재로 살림살이가 옹색해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했는데요. 아기를 안고 친정으로 가는 그 길, 차창으로 스치는 산마다 밤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습니다. 전날 새벽에 진통을 느끼며 갔던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보지 못했던 꽃이라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아기에 대한 설렘은 잠시, 어떻게든 이겨내며 아이를 제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각오와 절박함만 자꾸 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 앞에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이라 더욱 특별하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환하게 핀 꽃이 아기에 대한 축복만 같았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늘 지켜봐 주는 어떤 존재의 위로와 응원으로도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돌아보게 했고, 다시는 그처럼 생각하지 말자 다짐하게 했습니다.

밤꽃은 이렇게 특별한 꽃이 되었습니다. 힘든 시절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준 꽃이 되었습니다. 늘 보고 자랐으면서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꽃이었는데, 그날 이후 아이 생일 무렵인 유월 중순에 피어나는 꽃으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아이 생일 무렵이면 눈여겨보면서 더욱 특별한 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봄꽃들이 지기 시작하면 밤꽃이 기다려지고 나도 모르게 밤나무가 자라는 곳들을 자꾸 더듬게 됩니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그해 온 산에 하얗던 밤꽃과 아이가 태어나던 그때가, 그리고 살아온 날들이 떠올라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하고요. 이처럼 특별한 밤꽃을 올해, 처음으로 찬찬히 살피며 보게 되었습니다. 책 <내 마음의 들꽃 산책>(진선북스 펴냄)에서 이 부분을 접하면서입니다.
 
 밤나무 꽃 암꽃입니다.
밤나무 꽃 암꽃입니다. ⓒ 김현자
   
 꽃이 핀 줄기마다 암꽃이 달려있지 않다. 자세히 보면 수꽃만 피어있는 줄기들이 더 많다. 꽃을 피우는데 많은 정성과 에너지를 쓴다는 식물로선 수꽃도 최소한만 피우면 될것이다.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꽃을 피우는 밤나무. 덕분에 많은 생명이 살아갈 수 있다.
꽃이 핀 줄기마다 암꽃이 달려있지 않다. 자세히 보면 수꽃만 피어있는 줄기들이 더 많다. 꽃을 피우는데 많은 정성과 에너지를 쓴다는 식물로선 수꽃도 최소한만 피우면 될것이다.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꽃을 피우는 밤나무. 덕분에 많은 생명이 살아갈 수 있다. ⓒ 김현자
 
밤나무의 밤꽃은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늦은 봄 유백색의 꽃들이 나무 가득히 피어나면 다소 야릇한 꿀 냄새도 나고 금세 눈에 띄니까요. 그런데 이 꽃들은 사실 꽃가루 만드는 일을 하는 수꽃이랍니다. 밤나무 암꽃도 한번 찾아보세요. 수꽃들이 달리는 줄기 조금 위쪽에 연둣빛의 유백색 암술머리가 달린 듯한 아주 작은 암꽃이 있어요. 물론 밤송이는 이 암꽃이 자라 만들어집니다. - <내 마음의 들꽃 산책> 253쪽.
 
특별한 꽃인데도 그동안 가까이서 들여다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골목에 피어난 꽃을 찍는다고 마을버스를 여러 번 놓쳤을 정도로 꽃이라면 모두 좋아하는데도 말이지요.

높은 나무에 피는 꽃이라 그랬겠지요. 해마다 가까이에서 다시 피어주는 흔한 꽃이라 그랬을 것이고요. 그러니 특별한 꽃인데도 멀찍이서 빙긋 웃으며 바라보곤 했더랬고요. 이런 밤꽃을 책 덕분에 처음으로 자세하게, 그리고 자주 들여다보며 미처 모르고 있던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밤꽃은 풍매화입니다. 수꽃의 수술이 바람 따라 이동해 암꽃에 닿아 수정하게 되겠죠. 그러니 곤충이 날아들지 않아도 수정은 가능할 것이고요. 그럼에도 수꽃을 정말 많이 피워내는 밤나무랍니다. 어쩌면 암꽃 한 송이 수정하고도 남을 엄청난 양의 수꽃들을 말이지요.

식물 관련 책들에 의하면, 식물들은 꽃을 피울 때 가장 많은 정성과 에너지를 쓴다고요. 수정을 제대로 해야 번식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곤충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한 쪽으로 진화를 한 결과 다양한 색과 모양의 꽃이 피는 것이라고요. 밤이나, 흐린 날 혹은 비 오는 날에 꽃잎을 오므리는 꽃들이 많은데요. 그처럼 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하지요.

애써 많은 수꽃을 피우는 건 밤나무로썬 엄청난 낭비일 텐데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물론 밤나무만의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밤나무가 그처럼 엄청난 양의 수꽃을 피우는 덕분에 수많은 생명이 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올해도 지난해처럼 멀찍이서 보는 것으로 안부를 주고받고 말았겠지요. 책 덕분에 밤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까지 하며 밤나무가 왈칵 고맙게 와닿았습니다. 아이를 축복해주던 그때처럼 은혜롭게 와닿고요. 밤꽃에 대한 새로운 감동과 함께 힘든 날들을 이겨온 가족들이 새삼 더 고마운 요즘입니다.
 
'여전히 제 마음을 흔드는 존재는 들꽃입니다.' - <내 마음의 들꽃 산책>
 
 <내 마음의 들꽃 산책> 책표지.
<내 마음의 들꽃 산책> 책표지. ⓒ 진선북스
 

이처럼 큰 감동을 준 <내 마음의 들꽃 산책>, 저자는 식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알고 있을 이유미씨입니다. 저자는 얼마 전까지 국립수목원에 근무, '우리나라 식물명의 정리, 희귀식물 보전, 한반도 식물지 사업'과 같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을 해오는 한편 식물 관련 여러 권의 책을 써왔습니다.

이 책은 그가 함께 해온 수많은 꽃, 그에 얽힌 사연들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풀꽃과 나무꽃으로 구분한 후 그 달에 피는 꽃이나 열매 맺는 꽃들을 몇 가지 선정해 알려주는데요. 식물 이야기에 앞서 그 달에 많이 피는 꽃들, 그 특성이나 관련 생태 등을 아우르는 이야기를 먼저 들려줌으로써 식물들의 한살이와 자연생태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400쪽이 넘는 다소 두꺼운 책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글들입니다. 그러니 정말 많은 식물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밤꽃처럼 그 식물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지식까지 풍성하게 들려주네요. 식물 사진으로 유명한 고 송기엽 사진이 이야기마다 실려 있고요. 그래서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어지간한 꽃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답니다.

내 마음의 들꽃 산책

이유미 (지은이), 송기엽 (사진), 진선북스(진선출판사)(2021)


#내 마음의 들꽃 산책#풀과 나무#밤꽃(밤나무 꽃)#밀원식물#이유미(식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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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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