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불볕더위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서울 종로구 공원에서 한 60대 남성이 온열질환으로 숨을 거뒀다. 당시 종로구의 낮 기온은 35.1도였다. 7월 31일 기준으로 올해 온열질환 사망자는 13명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폭염으로부터 안전한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을까.
서울 전역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지난 7월 29일, 서울시 노원구 창동교 인근 산책로에 '힐링냉장고'라 적힌 냉장고가 한 대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300mL 생수병이 가득했다.
그 옆에는 '재난안전봉사단'이라 적힌 노란 조끼를 입은 최말순(74)씨가 있었다. 최씨는 자전거를 타고 온 신영호(75)씨와 인사를 나누더니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건네주었다. 신씨는 목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아직 성에가 묻어있는 생수병을 열어 연거푸 물을 마셨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는 지나가다 남의 집에 들러서 '물 한 바가지 주세요'하고 얻어먹었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식당에 가서 물 한 컵 주세요' 그러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렇게 공짜로 물을 주니 얼마나 고마워요. 오아시스야!"
힐링냉장고는 쉽게 말하면 '무료 물 나눔터'다.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생수 한 병씩 받아 갈 수 있다. 냉장고(실제론 냉동고를 사용한다)에서 갓 꺼낸 시원한 물이라, 여름철 온열질환자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지난해 노원구청이 전국에서 최초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실시 이후, 구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언론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올해 노원구 힐링냉장고는 7월 21일부터 8월 31일까지 주말을 포함해 42일 동안 운영된다. 노원구청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산책로와 하천변 15곳, 그리고 코로나19 임시선별진료소 3곳까지 총 18곳에 냉장고를 설치했다.
노원구 자치안전과가 사업을 관리하고, 사업을 돕는 자원봉사자인 '재난안전봉사단'만 약 100여 명에 이른다. 생수는 입찰을 통해 선정된 업체로부터 조달받는다. 자치안전과 안태유 과장은 "평일에는 약 5만 개, 주말에는 약 6만 개의 생수가 소비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누군가 생수 싹쓸이... 재난안전봉사단 도입
힐링냉장고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인기다. 당현천에서 자전거를 타다 힐링냉장고를 찾은 장원빈(13)군은 "돈이 부족해서 물을 사 먹기는 좀 그런데 이렇게라도 마실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했다. 박태훈(13)군은 들뜬 목소리로 "300mL는 부족해요. 500mL나 1L도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노원구에서 50년 넘게 거주한 이윤자(72), 박다복(65)씨도 불빛정원에 오면 힐링냉장고부터 찾는다. 이윤자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생수를 얻어서 여기 평상으로 와요"라고 했다. 박다복씨는 "여름엔 시원한 물 마시면서 그늘진 곳에 있는 게 최고에요"라고 했다.
올해 힐링냉장고의 원활한 운영은 '재난안전봉사단'의 공이 크다. 지난해에는 냉장고만 덜렁 비치됐는데, 누군가 생수를 '싹쓸이'해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재난안전봉사단이 도입된 이유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생수를 나누어주고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역할을 한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4시간씩 4교대로 돌아간다. 60~70대 이상 어르신이 대다수다. 봉사활동을 좋아하거나 지역자치 활동에 적극적인 경우 등 어르신들이 재난안전봉사단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다양하다.
지하철 4호선 기관사를 하다 지난해 정년퇴직한 윤영록(61)씨는 불빛정원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재난안전봉사단으로 근무한다. 더운 날씨에도 시민들에게 밝게 인사를 하며 생수를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재난안전봉사단으로 일하는 게 자기에겐 마치 복덩이가 굴러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기관사로 일할 때는 사람들한테 부담을 좀 느꼈어요. 승객에게 민원 들어오면 매번 징계 먹고 시말서 쓰고. 좋은 일로 문 두들기는 일은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봉사하면서 사람들이 고맙다 그러고 친해지고 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일하면서 동네 사람들 살아가는 얘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요. '내가 동네 사람들하고 이렇게 가까이 있었구나' 생각하죠."
시민들이 고맙다며 재난안전봉사단에게 선물을 주는 경우도 꽤 있다. 어린이교통공원 근처에서 근무하는 박오목(73)씨는 시민에게 받았다는 복숭아를 인터뷰 중에 기자에게 건넸다. 성서대 인근에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인터뷰에 응한 김아무개씨는 봉사하는 도중에 시민들에게 커피와 반짇고리 선물도 받았다고 했다.
최말순씨는 "2시간 일하면 구청에서 만 원을 받아요. 그런데 그거 받으려고 일하진 않잖아요. 봉사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하는 거죠"라고 했다. 인터뷰한 4명의 재난안전봉사단은 시원한 물을 마시고 좋아하는 시민들과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고 교류하는 데서 봉사활동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5~6만 병 소비되는 생수병이 남긴 숙제
힐링냉장고와 관련해서 좋은 목소리만 있진 않았다. 많은 재난안전봉사단이 더위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날 4시간 동안 야외에서 일하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일주일 동안 봉사하면서 팔과 발이 이렇게나 탔다면서 보여준 어르신도 있었다.
쓰레기 문제도 있다. 힐링냉장고는 300mL 생수만 취급하는데, 아쉽게도 시판 중인 300mL 생수병의 경우 무라벨 제품이 없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라벨이 붙어있는 생수를 받아갈 수밖에 없다. 라벨이 붙은 채로 버려진 생수병은 재활용하기 어려워 라벨을 떼는 분리수거가 필수적이다.
매일 5~6만 병이 소비되는 생수병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온열질환자를 예방한다는 힐링냉장고의 사업 취지는 좋지만, 플라스틱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사회적 흐름에는 반한다는 것이다.
노원구청의 안태유 자치안전과 과장은 이런 아쉬운 점들을 인지하고 있다고 했다. 안 과장은 "햇빛에 강하게 노출되는 위치에 있는 냉장고 몇 개소는 그늘 쪽으로 위치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창동교 인근 냉장고는 며칠 내 다리 밑으로 옮길 예정이고 경춘선 철교에 있는 냉장고도 그늘진 곳으로 옮기려고 준비 중입니다"라고 했다. 위치 조정이 어려운 곳에는 파라솔을 설치했다. 봉사단에게 목에 거는 선풍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과장은 더위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선 결국 봉사 시간을 줄이는 게 급선무라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70명가량의 봉사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100여 명 정도 됩니다"라며 "앞으로 인력을 더 충원해서 가능한 한 봉사 시간을 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일 수 있게 하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쓰레기 문제 개선을 위해 노원구청은 냉장고 근처에 분리수거함을 설치했다. 외부 쓰레기는 반입이 제한되어 있다. 재난안전봉사단은 시민들에게 페트병에서 비닐 라벨을 떼서 버리도록 요청한다. 그냥 버려진 페트병은 봉사단이 일일이 라벨을 떼서 분리수거한다. 안 과장은 "봉사단이 라벨과 페트병을 분리해놓으면 자원순환과에서 바로 회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안 과장은 "물론 애초에 플라스틱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일단은 분리수거한 상태로 깨끗하게 회수해서 처리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추후에는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면서 온열질환자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협업하는 힐링냉장고
하루에도 수만 명의 시민이 노원구 힐링냉장고 덕에 잠시나마 폭염을 잊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시원한 여름을 위해 구슬땀 흘리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다. 구청 직원과 재난안전봉사단, 그리고 물을 조달하는 업체 직원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시민들이 부족함 없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게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최말순씨는 힐링냉장고의 전반적인 운영을 관리하는 노원구 윤정규 주임을 치켜세웠다. 최씨는 단톡방을 보여주며 "아침 6시 전부터 밤 10시 이후까지 봉사자들의 요구에 하나하나 답변해주시는 게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했다.
힐링냉장고의 원활한 운영에는 재난안전봉사단의 공도 크다. 노원구 재난안전팀 송재혁 팀장은 "무더운 날씨에 고생하시는 '재난안전봉사단'분들 덕분에 이 사업이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또한 물을 조달하는 업체 '더알리오'의 직원들도 주말 없이 땀을 흘리고 있다. 힐링냉장고 생수는 보통 2시간 주기로 채우는데, 이용량이 많을 때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노원구민 스무 명이 직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더알리오'의 하재성 사무국장은 "새벽부터 나와서 물을 조달하는 게 힘들긴 합니다. 그래도 시민들이 폭염을 이겨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보람을 갖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게 다가온다. 폭염으로 인해 매년 사망하는 사람은 사회적 취약계층이다. 집에 에어컨을 달 여력이 없는 쪽방촌 사람들이 그렇고, 폭염에도 야외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렇다. 더군다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폭염의 빈도와 강도는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방법은 없지 않다. 폭염으로 인한 죽음은 모두의 노력으로 예방할 수 있다. 노원구 힐링냉장고는 폭염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이 협업해서 만든 사회적 안전망이다. 앞으로 또 어떤 아이디어가 등장해 시민들을 '시원하게' 해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