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비냐.
판타지 웹툰 <푸른사막 아아루>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여성 캐릭터의 이름이다. 그는 왕국의 비밀을 캐내는 데 큰 역할을 맡은 중요한 조연이다. 지혜롭고 학식이 높으며, 교수이자 특수한 기록을 관리하는 담당자다. 스비냐는 웹툰의 설정 상 200살이 넘었고, 겉보기에 오십 대 초반으로 그려진다. 얼굴 반쪽을 덮은 화상 흉터에 투블럭 숏커트를 하고 다니며, 굴곡이 없는 마른 몸을 지녔다.
내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스비냐가 웹툰 안에서 성별과 나이 불문 모두가 연애해보고 싶은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외양은 흔히 사회에서 '아름답다'라거나 '매력적이다'라고 판단하는 기준과 꽤 거리가 있다. TV에서 '빛나는 외모에 몸매까지 완벽하다며 칭송'하는 여성 연예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푸른사막 아아루>의 작가가 스비냐에게 위와 같은 설정을 부여한 것은 우연일까?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은 예술 작품을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는 조이한 작가의 아트 에세이다. 저자는 아름다움을 역사적으로 누가 정의했는지 살펴보고, 여성이 고대 신화에서 현대 사회까지 어떤 존재로 다루어졌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유명한 예술 작품들에 가부장적 시각이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지 조금씩 피부에 와 닿는다.
그림 속 여성의 누드는 손이나 옷으로 성기가 가려지는 '정숙한' 자세를 취한다. 반면 남성의 성기는 '아름다운 육체의 한 부분으로 거리낌 없이 관람자 앞에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p.82)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의 '이상적인 몸'의 형태도 규정한다. 여성은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매끈한 몸으로 무기력하게 남성이 구원해주기만을 기다리는'(p.185) 모습으로 그려진다.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아내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몸을 본다. 팔다리에 털이 나지 않는 유전자를 물려받아, '제모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내가 떠오른다. 등과 옆구리에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을 때, 중년 여성의 울퉁불퉁한 등을 떠올리며 '내 몸이 부끄럽다'라고 여겼던 내가 떠오른다.
내가 '다행'이고 '부끄럽다'라고 생각했던 기준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도대체 언제부터 나의 몸과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매끈하고 날씬한 여성의 몸을 비교하기 시작한 걸까? 가부장적 사회의 필요로 창조된 대상 속에 갇혀, 그대로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았던 내가 보인다.
'아름다움'은 누구의 시선을 바탕으로 했나
현대의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은 전통적으로 묘사되던 여성의 전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몸, 욕망하는 몸, 피 흘리는 몸, 상처 입고 강간당한 몸, 폭력으로 얼룩진 몸'(p.302)을 그리기 시작했다.
1992년 제니 사빌(Jenny Saville)이 그린 <낙인찍힌>(p.303)의 주인공 여성은 지친 얼굴을 하고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대어 있다. 누드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피부는 전체적으로 푸르뎅뎅하고 얼룩덜룩하며, 얼굴부터 배까지 드러난 몸 위에는 군데군데 글씨도 쓰여 있다. 그의 거대한 가슴은 축 늘어져 있고, 심지어 보란 듯이 자신의 왼손으로 뱃살을 움켜쥐고 있다.
'아름답지 않은 여성의 몸은 남성이 독점한 시선 권력에 대한 저항'(p.306)으로 볼 수 있다. 제니 사빌의 작품은 가부장적 사회가 추구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웹툰 <푸른사막 아아루>에서 스비냐가 매력적인 캐릭터로 설정된 것도 같은 시도가 아닐까. '늙고 빼빼 마른 몸에 화상 입은 얼굴'을 가진 스비냐가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순간, 웹툰을 보는 사람의 시야도 넓어진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규정하는 아름다움'이 유일한 진리인지도 질문할 수 있다.
스비냐와 제니 사빌의 작품 속 주인공을 되새기다가, 나의 몸을 만져본다.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서 운동 할 수는 있겠지만, '날씬해야 한다'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살을 빼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나의 겉모습이 가부장적 사회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온전한 나의 취향인지 아직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 몸의 형태든 단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아름답지 않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분명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