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인 1928년 5월 14일 대만 중부도시 타이중에서 찍힌 사진이다. 붉은색 원 안에 한 청년이 남성들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에 서있던 어린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채 뒤쪽을 바라보고 있다. 옆에 서있던 시민들도 마찬가지. 붙잡힌 남성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한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5분, 대만 타이중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도서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에게 독을 바른 단검을 던진 조명하 의사가 의거 직후 체포된 모습이다.
13일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교수는 최근 그가 발굴한 당시 현장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조명하 선생의 의거 직후 모습이 담긴 이 사진은 1928년 6월 14일 발행된 일본어 신문인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 호외판 1면에 실린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사진은 조 의사의 의거 현장 모습을 담은 유일한 사진"이라며 "해당 보도는 5월 14일 거사 이후 철저한 비밀 사안으로 한 달간 언론 보도 통제가 됐다가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조명하, 독을 바른 칼을 던지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조명하는 1905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과 신학문을 익힌 조명하는 1920년 학교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약방일을 도우며 공부해 몰두했다. 1926년 스물한 살에 군청 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해 신천군청에서 근무하였다. 하지만 그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만세운동 후 가을이 되자 그는 항일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적을 알아야 제대로 싸울 수 있다'는 청년 조명하 나름의 고민과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상공전문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메리야스 공장과 상점에서 일을 했지만 기회가 닿질 않았다. 1년 정도 일본에 머물던 조명하는 이듬해인 1927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심한다. 상하이에 자리한 임정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조명하는 상하이로 향하는 길 자금 마련 등을 위해 중간 기착지로 대만에 들렀다. 타이중에 자리 잡은 조명하는 찻집 '부귀원'에서 신분을 숨긴 채 배달을 하며 기회를 엿봤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점은, 대만에 기착한 조명하는 의거의 성공을 위해 단도를 던지는 비도술을 연마했다는 것. 조명하는 단도를 던지고 또 던지며 기회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일왕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가 특별 검열사 자격으로 타이완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의거를 결심한 조명하는 찻집 직원 복장을 한 채 환영 인파 속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의전 차량이 커브를 도는, 차가 속도를 줄이는 그 시점에 맞춰 구니노미야에게 칼을 던진다. 당시 구니노미야는 8대 차량 중 두 번째 무개차에 탑승했다. 조명하 의사는 차량에 뛰어올라 칼을 던졌지만 실패했고, 재차 칼을 던져 구니노미야의 목덜미와 어깨에 찰과상을 입혔다. 당시 현장에서 조 의사는 군중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다.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8개월 뒤인 이듬해 초 세균감염에 의한 복막염으로 사망한다. 조 의사가 던진 단검에 묻은 독이 구니노미야 사망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구니노미야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앞서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한다. 그의 나이 스물셋에 불과했다. 고향에는 부인과 갓난아기 아들만 남았다.
조 의사 의거, 왜 더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구니노미야는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일왕의 장인이자 일본 군부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실력자였다. 이런 인물이 조 의사의 독이 묻은 단검에 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는 조명하 의사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가 어떤 단체의 도움이나 지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으로 준비하고 실행된 거사였기 때문인데, 당시 일제는 조 의사를 체포한 후 배후를 캐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조 의사는 자신이 행한 대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 의거임을 강조했다.
결국 조 의사는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 직전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다"면서 "아무 할말이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했다. 다만 조국의 광복을 못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 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긴 채 떠났다.
1963년 우리 정부는 조명하 의사에게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했다. 1978년 조 의사 의거 50주년을 기념해 대만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조명하 의사 흉상을 세웠다. 1988년에는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 입구에 조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조 의사 유해는 순국 후 3년 뒤인 1931년 4월 중순 고향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한국전쟁 후 월남한 후손들에 의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44번 묘역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