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마세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의 카불 입성으로 세계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한 아프가니스탄 여성 영화 감독의 절절한 호소가 전세계에 메아리치고 있다.
사라 카리미(Sahraa Karimi) 감독은 '세상의 모든 영화인과 시네필들에게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통해 아프간의 여성과 아동, 영화인, 예술인들을 탈레반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요청했다. 지난 13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공개된 이 서한은 해외의 영화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외신도 주목하고 있다.
필자는 네덜란드 출신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인 헤르얀 자울호프(Gertjan Zuilhof)씨가 페북에 공유하면서 처음 이 글을 접했다. 18일 현재 7000회 이상 공유되며 수많은 영화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카리미 감독의 트위터 계정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좌파성향 일간지 <뤼마니떼(L'Humanité)>에도 '위험에 처한 여성들'이란 제목의 커버사진으로도 소개됐고, 할리우드 영화매체 <데드라인>을 비롯해 독일의 <도이체벨레>, 인도 매체 등에서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영화인들이 탈레반의 처형 리스트에 오르게 될 것이다"
사라 카리미 감독은 누구이며, 이 편지는 대체 무슨 내용을 이야기 했을까. 카리미 감독은 극영화 및 다큐 장단편 영화 30여 편을 연출한 베테랑 감독이다. 아프간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영화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재원이다.
지난 2019년에는 수도 카불에 거주하는 세 명의 아프간 여성의 현실을 소재로 한 장편 영화 <하바(Hava), 마리암(Maryam), 아예샤(Ayesha)>로 베니스영화제와 부산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팔리카(Parlika)>(2016년), <바퀴 뒤의 아프간 여성들 (Afghan Women Behind the Wheel)>(2009년)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라고 할 수 있는 아프간의 유일한 국영 영화사 '아프간 필름(Afghan Film)'의 대표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현지 영화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카리미 감독의 임명 당시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활동해온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축전을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카리미 감독은 1996년에서 2001년 집권 당시 공포정치를 자행했던 탈레반의 입성이 예상되기 며칠 전, 여성으로서 영화 감독으로서 본인이 느끼는 두려움을 가감없이 전하며 국제사회가 침묵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줄 것을 적극 호소했다.
마음이 산산조각난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 아름다운 국민, 특히 영화인들을 탈레반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함께 동참해주시리라 간절히 희망하며 이 편지를 씁니다. 영화인으로서 제가 아프간에서 어렵사리 쌓아온 모든 것들이 무너질려고 합니다. 만약 탈레반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모든 예술행위를 금지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다른 영화인들도 이들의 처형 리스트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가 고발한 탈레반의 범죄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엄격하고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탈레반은 종교 의식 이외의 음악을 비롯해 영화라는 예술 자체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여성 가수는 가수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기도 했다.
카리미 감독은 또한 최근 몇 주간 탈레반이 협상중에도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잔인한 범죄행위를 생생하게 고발했다.
탈레반은 다수의 아이들을 납치했고, 어린 여아들을 탈레반 남성들에게 강제결혼으로 팔아넘겼고, 복장만을 이유로 여성을 살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여성의 눈알을 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코미디언을 고문하고 살해했으며, 시인이자 역사학자도 죽였거니와, 정부의 언론센터장을 살해했고, 정부와 관련된 이들을 암살해왔고, 일부 시민들을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했으며, 무수한 가족들이 고향을 등지게 했습니다.
아프간 정부군과 탈레반의 오랜 무력충돌은 미군과 나토군이 철수를 시작한 5월부터 심화됐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의 정부 관계자들에 대한 보복 공격과 암살작전이 자행됐다. 카리미 감독이 이 서한에서 언급한 코미디언은 애칭, 'Khasha Zwan'으로도 잘 알려진 나자르 모하메드(Nazar Mohammad)로 지난 7월 칸다하르에서 총살당했다.
8월 초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압둘라 아테피(Abdullah Atefi)는 탈레반에 의해 남부 우루즈간 주에서 살해당했다. 아프간 정부의 국내외 언론업무를 총괄했던 다나 칸 메나팔(Dawa Khan Menapal) 정부정보미디어센터장 또한 8월 6일 기도 중 살해당했다.
당시 탈레반 대변인은 암살을 인정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메나팔은 탈레반의 "특별공격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댓가"라고 평가했다. 탈레반은 그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언론인, 활동가, 문화예술인들을 주 타깃으로 공격해왔는데 최근 3명의 여성 저널리스트 살해도 이에 포함된다.
카리미 감독은 소녀와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탈레반을 비판했다.
아프간 국민들은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져 탈레반의 어두운 통치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아프칸을 포기하는 현 상황하에 우리는 지난 20년간 아프간 및 젊은 세대를 위해 이뤄낸 모든 성과가 이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 과거 탈레반의 집권 당시 학교에 갈 수 있는 소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탈레반 퇴출) 이후로는 9백만의 소녀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 탈레반이 장악한 3대 도시 헤라트에서는 무려 대학교의 절반가량이 여성이었습니다. 이는 국제사회가 잘 모르는 놀라운 성과입니다. 최근 몇 주동안 탈레반은 수많은 학교를 파괴했고, 200만 명의 소녀들을 학교에서 추방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현실
지난 18일 첫 기자회견을 열고 소녀와 여성의 교육 기회를 보장하겠다는 탈레반의 공식 발표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런 배경으로 유엔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탈레반의 약속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카리미 감독은 세계가 아프간의 비극적 상황에 침묵하지 않고 지원해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세계가 관심을 갖도록 도와주세요. 아프가니스탄 밖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주세요. 세계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아프간의 여성, 아동, 예술가, 영화인들을 위해 여러분의 지원과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아프간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사라 카리미 감독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나는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를 보전하고자 예술가로서 사회에 도전한다"라고 당당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계정과 트위터 계정을 통해 최근 카불 공항의 혼돈, 거리 모습, 정치적 상황 등 현지 사정을 공유해왔다.
특히 탈레반의 카불 입성 후 자신이 다급히 출국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은 134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란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이자 인권운동가인 마시 알리네자드는 이 영상을 공유하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고 카불의 현실이다. 지난주 영화제를 개최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생명의 위협으로 도망가야 한다"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한편 이런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현실은 영화 창작자에게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기도 한다. 2016년 칸 영화제 감독주간 대상에 빛나는 <늑대와 양>을 연출했던 샤르바누 사다트 감독은 8월 17일 <할리우드 리포터지>와의 인터뷰에서 급변하는 상황하에 출국 및 망명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아울러 이런 현실이 자신의 창작세계에 미치는 영향도 허심탄회하게 소개했다.
사다트 감독은 이전에는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소소한 아프간인들의 일상을 주로 묘사한 작품을 연출해왔으나 앞으로 살아남는다면 다른 색깔의 창작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여기선 아무도 책을 읽지 않기에,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지난 100년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어 이를 통해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다"라며 "역사를 아는 것은 미래 아프간을 위한 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간이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역사와 관련된 다른 국가들의 역할에 대해 교육용 역사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사다트 감독은 불안정한 현 상황과 현실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고있다. 그는 "이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이 분노가 주는 많은 에너지일 것"이라며 이를 통한 글이나 영화 제작 뿐만 아니라, 뭔가를 조직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전망하기도 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탈레반은 과거 집권시 이슬람 율법 '샤리아'로 사회를 엄격하게 통제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윤리경찰 제도로 남성은 수염을 기르고 여성은 온몸을 감싸는 부르카를 강제했고 여성이 공공장소에 남성 없이 외출시에는 구타를 가했던 잔혹한 인권탄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 LGBTQ커뮤니티 매체 메트로위클리의 인용보도에 의하면, 현직 탈레반 판사 (Gul Rahim)는 7월 독일 매체 'Bild'와의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이미 엄격한 샤리아법을 실행중이며, 동성애 남성에 대한 처벌은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지거나, 벽 뒤에 세워놓고 벽을 사람 위로 덮어버려 처형한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여성 오피니언 리더들은 공공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아프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자 인권운동가인 사바 사하르(46)는 2020년 8월 카불에서 영화 작업을 위해 이동 중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다. 2014년 세계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말라라 유사프자이(24)는 불과 15세때 소녀들의 교육권 옹호활동을 이유로 '파키스탄 탈레반'에게 암살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말라라 유사프자이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탈레반의 귀환으로 "아프간 자매들"에 심한 우려를 표하며 여성인권보호를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요청했다.
"우리는 아프간전쟁에서 무엇이 실패였는지 앞으로 토론할 시간이 충분하다. 하지만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는 아프간 여성과 소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약속되었던 교육, 자유, 미래, 보호를 원하고 있다. 이들을 계속 실망시킬 순 없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사라 카리미 (Sahraa Karimi) 감독의 공개서한 한글 +영문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N_kMlo21lIo0hdk-YfBEtzdHpg8PPdK856kw6KF8Jh4/edit?usp=sh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