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화소양(隔靴搔痒). 발이 가려우면 신발을 벗고 발을 긁어야 시원해질 텐데, 신발을 신은 채 가려운 발을 긁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즉, 일하느라고 애는 무척 쓰지만,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상황을 이르는 고사성어다. 지금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한다며 언론중재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여당이 사실상 이 꼴이다.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 전선, 어쩌다 이렇게 갈렸나
허위·조작 보도나 혐오·차별 보도로 인한 언론 피해가 심각하다 보니, 많은 국민이 조중동 등 족벌언론사 횡포에 진저리치며 제대로 된 언론개혁을 추진해서 제발 '가짜뉴스' "좀" 없애자고, 또 '기레기'들 "좀" 없애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런 열망이 작동해서인지 다수 국민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찬성하고 있다.
여당은 "언론 보도 등으로 인한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려는 것"이라며 언론현업단체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을 골자한 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밀어붙여 지난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에서 통과시켰다. 상당 부분 독소조항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몇몇 조항은 문제가 있다.
언론노조와 기자협회 등 언론현업단체들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 나날이 증가하는 허위·조작 정보에 따른 시민·이용자의 피해를 구제하고 보상을 강화하는 데 동의"하면서 "민주당은 8월 중 강행처리 방침을 철회하고, 국민공청회 등 사회적 숙의와 합의 과정으로 제대로 된 언론 이용자 피해 구제 방안과 언론자유 강화 방안을 만들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기어이 밀어붙이는 이유는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다. 불리한 보도는 가짜뉴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정권과 여당에 유리한 보도는 부각시키려는 단 하나의 목적밖에 보이지 않는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막는 것은 언론탄압법이자 언론장악법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민주주의 가치를 후퇴시키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악법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국민의힘 전주혜 원내대변인 논평, 8월 19일). '과거로 되돌아가는 악법'이라는 언급이 왠지 생뚱맞다.
지난 촛불항쟁과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 당시에는 다수 국민+언론현업단체+민주진보정당 vs. 박근혜정권(잔당)+새누리당(국민의힘) 형태로 투쟁 전선이 형성됐다. 그런데 언론중재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는 다수 국민+민주당 vs. 언론현업단체+국민의힘 형태로 투쟁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여당 선의 믿고 싶지만, 현재 개정안은 수정돼야
언론중재법 개정 논의와 관련해서 올바른 판단 기준은 '일반 시민들의 언론피해 구제의 효율성과 적합성'에 두어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소속 상임위원회인 문체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그 핵심은 민언련 의견처럼 "어떤 보도가 허위조작 보도라는 것을 피해자가 입증하게 된다면 행위자인 언론사는 고의·중과실이 없음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입증책임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또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의 역할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는 요건을 열거하고 있는 고의·중과실 추정 조항"에 대한 추가 수정이 필요하다. 공직자 등의 퇴직 후 배액배상 제소도 배제하고, 공직자 등의 위법행위와 관련된 일반인들의 배액배상 제소도 배제되도록 추가 수정되어야 한다.
"언론피해 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고자 한다"는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의 선의를 최대한 믿고 싶다. 그러려면 촛불항쟁과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의 연대 전선을 깨뜨리는 지금의 모양새는 시정되어야 한다. 국회 7개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야당에 배분되기 전 문체위를 통과하는 문제가 절박했다는 여당 측 설명도 최대한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어차피 개정법은 내년 4월부터 시행하는 것이지 않은가. 더불어민주당이 위원장과 의장을 맡고 있어서 언제라도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의결 절차의 시한을 일단 올해 12월 초로 연장하자. 그 사이 국민적 숙의·토론 과정을 거치자. 그래서 촛불항쟁과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 때 연대 전선을 다시 복구하자. 그 과정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공영언론 이사와 사장 추천 절차'를 확립하는 법 개정을 함께 처리하고, 아울러 더불어민주당도 찬성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법 개정도 함께 실현시키자.
시민 입장에서 언론피해 구제 방안 고민해야
한편, 문체위를 통과한 개정안대로 시행하게 된다 하더라도, 시민의 언론피해가 실효성 있게 구제되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격화소양(隔靴搔痒)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법 개정의 핵심 명분과도 연결되는 '신속하고 간편하면서 적절한 수준의 언론피해 구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논의 이외에 추가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우선 언론피해 구제의 실질적인 장애물인 정보의 비대칭성이나 막대한 소송비용 문제를 살펴보면, 엄격한 증거주의와 법관의 자유심증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법원에서의 구제 절차는 일반 시민인 피해자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론중재 절차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긴급조정' 제도 도입과 직권조정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이 될 것이다. 현행 언론중재법은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해서 중재부에서 신청인(피해자)의 주장이 이유 있다고 판단될 경우, 신청 후 21일 이내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긴급조정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는 당사자가 이의를 신청하면 그 결정은 효력이 상실되고 자동으로 법원에 소송이 제기돼 결국 '길고도 지루한' 사법절차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런 난감한 상황을 피해서 언론피해자가 신속하고 간편한 피해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중재부의 직권조정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 언론사의 이의신청에 의해 효력 상실하도록 되어 있는 법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사법부의 재판과 같은 법적 효력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간접적으로라도 피해구제를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직권조정 결정이 있는 경우는 언론사가 이의를 신청하여 법원의 재판 절차로 가게 되더라도, 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해당 언론사(포털 포함)의 해당 기사에 직권조정 결정의 내용이 표시되도록 강제하고, 또 직권조정 결정이 있었음에도 직권조정 결정에 해당하는 기사를 별도의 충분한 검증 절차 없이 복제·인용 보도한 경우에 배액배상의 대상이 되게 하는 등의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21일 이내라는 기간도 너무 길 수도 있다. 긴박한 사정이 있을 때는 언론피해자가 긴급조정을 신청하고 사유가 인정될 경우 긴급조정담당 중재부가 긴급조정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그 효력은 직권조정 결정 정도의 효력을 인정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법원에서 소송이 진행될 경우 언론피해자의 과도한 소송비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하여, 국가의 소송비용 지원이 가능한 제도인 기존의 소송구조제도에 특칙을 둔다든지, 확정판결 후 부담하는 소송비용의 산정 시 특칙을 두는 방식도 적극 모색될 필요가 있다.
지금이라도 왕년의 동지들이 서로 낯을 붉히며 삿대질하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대타협이 긴요하다. 모두 결단하라!
* <언론포커스>는 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글입니다. 언론 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한국진보연대 대표입니다. 이 글은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www.ccdm.or.kr), 미디어오늘, 슬로우뉴스에도 실립니다.